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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문이 안열려" 이 마지막 울분의 뒤에 드리워진 신림동 반지하방 세 가족의 비극
  • 편집국
  • 등록 2022-08-10 08: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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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눈물이라는 걸 아주 오랜만에 쏟아낸 찰라의 것들에..... 비탄스러움만

[조대형대기자]


슬픔은 인간이 경험하는 주요하고 보편적인 감정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동일한 표현으로 개념화된다고 해서, 모든 슬픔이 질적으로 동종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슬픔은 인간이 경험하는 일상적 희노애락의 경계를 넘어서서, 그 자체로 철학의 탄생을 매개하는 특별한 내면적 사건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여기에 적고 있는 한 가족의 몰살과 이 사회의 비극은 이미 국가가 조장해 오고 있었다고 밖에 달리 생각이 들지 않는다.여기에서 아래의 전개되는 13살 어린 아이의 죽음 전에 엄습했을 공포감을 말하려는 것는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야 할, 이미 살아 온 주조건물의 지하에 사람이 살아도 될 방을 만들토록 허용한 이 국가의 주택법, 건축법은 누굴 위해서였을까? 사람이 숨을 쉴수 있는 공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주거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는 이미 없다. 현대 건축공법이 한국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착착 진행된, 이른바 살인예고는 여러곳에서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열세살 아이가 지하 단칸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 일가족의 비극. 이 슬픔의 당사자들이 떠나고 남겨진 할머니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지난 8일 오후 기록적 폭우에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서 참변을 당한 A양(13)이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다. 할머니 이모(72)씨는 그날 오전 조직검사를 위해 한 대학병원에 입원하는 통에 변을 면했지만, 이씨를 병원에 바래다 주고 돌아온 이씨의 큰딸 B씨(48), 작은딸 C씨(47)와 손녀 A양은 갑자기 집안에 들이닥친 물살을 피하지 못했다. 외국계 의류 유통업체 노조 전임자로 일하던 C씨가 생계를 책임지며 다운증후군이 있는 언니 B씨까지 돌보며 살던 가족이었다.이씨는 “둘째 아이가 내 병원 일정에 맞춰 하필 이날 휴가를 냈다”며 “병원에 입원하지만 않았어도 얘는 (회사에 있어) 살았을 텐데 난 엄마도 아니다”라고 자책했다.이씨가 들은 작은딸 C씨의 마지막 목소리는 밤 8시 37분 걸려온 전화 넘어로 전달된 “엄마 물살에 (열려있던) 현관문이 닫혀버렸는데 수압 때문에 안 열려”라는 말과 울먹임이었다. C씨는 8시 43분과 8시 53분 친한 언니 김모씨에게 “119가 아예 안 받는다”며 도움을 청했다. 같은 시간대 119는 500건 이상의 신고 접수가 몰리며 먹통이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김씨가 “나도 여기서 (119에) 전화할 테니 너도 계속해라”라고 말하는 사이 통화음은 지지직 거리기 시작했고 “언니니니” 하는 C씨의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이후 김씨는 “119에 주소 남겼으니 기다리라”고 문자를 남겼지만 읽지 못했다는 의미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씨는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그 뒤론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처참의 슬픔을 동반한 비극에 대해.....우리는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치명적인 사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서글프다. 19세기는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가 개인 우선주의와 자국 우선주의를 낳았다. 국가는 무엇이며, 그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싶어 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국가를 ‘집단적으로 당한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함께 슬퍼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수천년 동안 지형적인 특수성 때문에 강대국에 둘려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질곡과 회한의 세월을 견뎌왔다. 우리에겐 한(恨)이란 독특한 유전자가 있다. 우리는 이 유전자를 가지고, 경제적으로 행복하고, 정치적으로 성숙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지난 40년간, 빠른 속도로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를 이뤄 이 정도로 살게 되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갑작스런 경제적인 풍요는 우리 문화에서 함께 슬퍼하는 ‘한’을 몰아내고, 그 대신 개개인이 즉흥적이고 사사로운 일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분노(憤怒)를 수용한 가운데의 중심에 누군가는 설계를 하고 건축을 했을 지하방,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한 건축주의 세심하고 철저한 자본증식의 과욕이 만들어 낸 산물은 아닐까? 지하방을 만들지 않고는 월세수입의 채산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얄팍한 셈법도 한몫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사람들은 이 시간이 지나면 남이 먹거나 노는 모습을 보고 웃거나, 현실을 망각하기 위한 판타지를 파는 프로그램로 가득 차 있다. 쉽게 화내고 가볍게 웃고 마는 문화, 스마트폰을 하루 종일 보는 문화가 급속도로 자리 잡았다. 함께 슬퍼하는 것이 어색하다. 국가적으로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 비극을 직접적으로 당한 당사자 이외에는, 대부분은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국가는 비극적인 사건을 충분히 슬퍼하는 정교한 의례와 문화를 통해 탄생한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이 공동체의 씨앗이다. 

 

그러나 비애는 자신이 당한 어려운 처지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나 신세한탄을 넘어서는 숭고한 의미가 숨어있다. ‘자신이 아닌’(非)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생각하는 어진 마음’(心)이다. 상대방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슬픈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그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담긴 배려의 마음이다.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아이가 아플 때, 그 순간 어머니가 느끼는 마음이다.

 

8월10일 화요일의 아침에 내 심상은, 참 슬프고 침잠 스럽다.아직도 곳곳의, 각각의 만연한 현재적 비극을 어떻게 이 국가는 담아낼 것인지 아니 정부가 어떻게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인지를... 곳곳에서 보이는 그의 내공, 비극이든 우울이든 그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들여다 볼 용기를 갖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우울 속의 희망을 갖는 만큼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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