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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여자, 한국정치인들의 애정행각 실상전모 [01]
  • 편집국
  • 등록 2020-11-23 15:56:29
  • 수정 2020-11-30 10: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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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정치 권력자들의 연인들, 그리고 추문의 의혹들 

그 어떤 고결한 정치지도자도 여자문제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진보주의적 정치인은 여자들을 경제적 원조대상으로 삼거나 은둔처로 생각한 것이 문제이고, 

보주수의적 정치인은 여성에 대한 육욕적 심미화가 문제였다.”

진보정치인은 자신의 아내 이 외의 여자들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경제적 영위만을 과잉으로 담으려다 보니 오히려 사랑을 망쳐버리고, 보수정치인들은 사랑의 합리적인 요소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 채 육욕의 집착에만 매달리다보니 성적상대로 만 치부해 버릴 수 있다는 비판인 셈이다.

   

이 글은 한국 현대정치의 지도자들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치정과 정치의 관계를 다루었다. 

물론 어떤 범인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나, 이 글에서는 정치지도자의 삶을 살았거나, 여인들과의 추문적 색채가 선명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특히 육체적 교합이 돈과 교환되는 상품을 목적으로 하거나 어떤 권력의 지배를 받는 일, 

또한 여자들의 경제력의 호위를 받으며 권력을 유지해 왔던 정치지도자도 있었다. 

즉 정치지도자들의 사랑은 연정으로부터가 아니라 정치를 소비하는 주체인 권력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여인네들이 그런 권력, 돈,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소비되지 않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사랑은 연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 이들의 딜레마라고 할 것이다.

   

특히 아름답지 않은 여성은 권력자와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하나의 진리와도 같은 통설과, 반면에 여성은 권력자인 정치인 개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추종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비극한 사실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이 글은 위대한 한국정치지도들이 시대의 격랑과 조우하면서 여자들에게 어떻게 휩쓸려 들어가고 어떻게 이용당했는지를 살피고, 또 정치지도자가 한 여인의 삶과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면서 지배력을 행사하는지를 다루었다.



이승만의 연인들, 그리고 여자에 대한 오명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젊은 시절이승만박사의 여자들, 사실 이승만(李承晩)박사는 여복(女福)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 결혼 초, 장장 6년간의 감옥살이를 했다 그것도 출옥한 후에도 5년 이상 미국에 유학하여 독신생활을 했다.


이같은 본처 박승선과의 불편한 인연은 결국 1912년에 이혼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부터 22이 지난 1934년에 가서야 프란체스카 돈너여사와 재혼을 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곱씹어 볼 알은 1912년 본처 박승선과 이혼하고, 1934년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결혼할 때까지의 공백기간 22년간을 홀아비생활로만 전전긍긍했을까 하는 점이다. 

아니면 홀로 독신의 고절함을 갖고 살았을까? 

그러나 하와이의 이승만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여자들로 붐비었는데. 주변 여자들 대부분은「사진결혼」으로 하와이에 건너와 자신들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은데 대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인테리」여성들로서 하와이 여러 섬에 산재한 한인교회 및「부인구제회」라는 단체를 통해 이승만의 정치자금을 거두는 일 등에 앞장선 사람들로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여성들 가운데서도 유독 이승만을 열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주는 인텔리 여성이 하나 있었다.


프란체스카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 그녀의 이름은 노디(김해)김(Nodie Kimhaikim)양…나중의 손노디(Mrs.Nodie Sohn)여사.원명이 김혜숙이며, 그녀는 황해도 곡산출신으로 여덟살 때(1905년 5월)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간 여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하와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아버지 김윤종씨가 만주로 도피한 듯 했고, 이에 따라 그녀는 홀로 남은 어머니, 오빠. 누이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단은 가정형편에 얶매이지 않았다. 1915년 카후마누 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이승만의 추천으로 美본토로 건너가 오하이오州의 우스터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후 그녀는 오하이오州의 명문 오버린 대학에 진학,1922년 역사.정 치학 분야의학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재학시절 필라델피아「한인대표자대회」(1919년4월)에 참석,열변을 토해 각광을 받은 바 있는 그녀는 대학졸업후 하와이로 돌아가 워싱턴에 머무르고 있는 이승만을 대신해「한인기독학원」원장직을 맡아 일했다. 시에 그녀는 다른 親이승만계 단체들,예컨대「한인기독교회」「동지회」「부인구제회」「한미친선회」「한미상담회」등의 이사 내지 회장직을 맡아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녀는 정부수립후 이승만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 53년11월부터 55년2월까지 외자구매처장(外資購買處長)직을 맡아 일했으며 그후 58년 하와이로 돌아갈 때까지 적십자사(赤十字社)부총재.인하대학교 이사(理事)직등을 역임했다.

노디 김이 하와이 망명객 이승만을 이토록 오래 가까이서 보필하다 보니 두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주위에서 쑥덕공론이 무성했다. 


그녀는 35년(즉 이승만이 프란체스카 돈너와 결혼한 다음해)에 호놀룰루의 상처(喪妻)한 교포실업가 손승운(Syung Woon Peter Sohn)씨와 결혼했는데 그 당시 그녀에게 딸려있던 만8세의 딸 위니프레드 李(Winifred Lee:일명 이보경)의 친부(親父)가 누구냐가 「뜬소문」의 핵심이었다.


이승만을 헐뜯는 쪽에서는 위니 프레드가 이승만의 딸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위니프레드 남바(Mrs.Winifred LeeNamba)여사가 집필한『손노디 약전(略傳)』에 따르면 노디 김은 27년에 이병원(Pyeung Won Lee)이라는 사업가와 잠시 결혼한 일이 있는데 이때 이씨에게서 얻은 딸이 바로 위니프레드라는 것이다.한마디로 위니프레드의 친부는 이(Rhee)승만이 아니라 이(Lee)병원이라는 주장이다.



불세출의 여인 임영신, ‘첫 여성출신’이라는 수식어를 만들어 낸 인물


초대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전 중앙대총장 임영신여사

노디 김 외에 미국 망명시절의 이승만에게 접근한 한국여성으로서는 임영신(任永信)을 손꼽을 수 있다.전라도 금산태생으로 3.1운동때 전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일제 감옥에서 6개월간의 영어(囹圄)생활을 했던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히 로시마(廣島)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귀국후 그녀는(공주)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23년말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국때 그녀는 유태영(柳泰永.柳泰夏의 형)의 요청으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때 일제가 한국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첩을 몰래 숨겨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마침 그곳을 방문중인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를 계기로 두사람은 서로 믿고 아끼는 동지가 되었다.임영신은 1899년 전북 금산(현재는 충남)에서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기전여학교에 입학한 뒤 ‘공주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을 모의했다. 3·1운동 때 기전여학교 교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투옥되었고, 극심한 물고문과 폭력을 당했다.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뒤 일본 히로시마여자전문학교(廣島女子專門學校)에 편입해 공부했고, 2년 뒤 귀국하여 공주 영명(永明)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1924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사우스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26년 석사학위를 마친 뒤 이승만이 불러 워싱턴에 가서 그를 도왔다.


이 시절 이승만이 임영신에게 호감을 느껴 청혼했던 일은 유명하다. 이승만은 그때 이미 유부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50세였기 때문에 임영신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컸다. 그 뒤 이승만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승만의 ‘승(承)’을 따서 자신의 호를 ‘승당(承堂)’으로 지었다.


1933년 귀국한 뒤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흑석동 땅을 사서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해 운영했다. 중앙대학교의 전신인 이 학교는 보모 양성을 위한 전문교육 기관이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조선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했다. 이때 임영신은 중앙보육학원을 철도학교로 사용하도록 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이름을 올렸고,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지도위원이 되었다.


광복 후 조선여자국민당(대한여자국민당)을 만들어 우익계 여성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결혼한 여성은 금치산자처럼 취급되어 남편의 허락 없이 독립적으로 법률 행위를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여성이 초대 내각의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 이승만의 지원을 빼놓고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공금 유용과 횡령 혐의로 기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밀수업체와 적산불하(敵産拂下) 브로커에게서 뇌물을 받았으며, 대통령 이승만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려고 거액을 모금하도록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판결은 무죄였지만 결국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뒤 1949년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대한여자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0년 2대 총선에서도 금산에서 당선되었다. 1953년에는 중앙대학교 초대 총장, 5·16 후에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과 대한부인회 회장을 지냈다. 1977년 승당 임영신, 미국 이름 루이스 임(Louise Yim)은 ‘여성 최초’라는 수많은 수식어를 남긴 채 유명을 달리했다.



한많은 여인 박승선의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


자료:이승만기념사업회/ 우측 맨 끝에 좌정하고 있는 여인이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첫 부인인 박승선

우리는 여기서 이승만의 본처인 박승선에 대한 부분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은 받기보다는 주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승만은 처음부터 박승선과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박승선에게서도 느껴진다. 박승선은 양아들 이은수에게 결혼한 이후로 내외가 한 번도 말다툼 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같은 을해생으로 산두화(山頭火)와 같아서 서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박승선은 남편을 위해 무려 7일간이나 궁 문 밖에서 엎드려 자신을 대신 가두고 남편을 풀어 달라고 매달리다가 옥중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을 위해 고생한 박승선을 향한 이승만의 애정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승만이 감옥서 안에서 쓴 옥중세모 14라는 한시에서 솜 옷 부쳐 준 아내가 보고 싶다고 했고, 회인15이라는 한시에서는 규방의 세월일랑 빨리 흐르게 하지 마라는 등 박승선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그냥 시를 위한 시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귀국해서 1955년에 쓴 제석이라는 한시를 봐도 알 수 있다. 平生除夕客中過 鄕思年年此夜多 異域送迎慣成習 在家還復憶歸家(평생을 섣달 그믐 나그네로 지내며, 고향 생각이 해마다 이 밤에 많아지는, 낯선 곳에서 보내고 맞이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 집에 있어도 집으로 돌아 가려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네)라고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이승만이 말하는 진짜 자기 집으로 생각하는 집은 조상이 대대로 살던 황해도 해주 집도 아니고, 자신이 태어 난 황해도 평산 집도 아니고,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종로2가 염동 집이나 중구 낙동 집도 아니고, 박승선과 결혼 생활을 했던 용산구 도동 집도 아니며, 프란체스카와 살던 돈암장도, 경무대도 아니다. 그냥 시를 위해 쓴 집이라는 단어에 불과하다.

   

자신을 드러내고 미화하는 내용을 심지어 조작까지 해가면서 문자로 남기기를 즐기던 이승만이 감옥에서 남긴 기록 가운데 박승선에 대한 애정을 담은 비망록은 한 줄도 없고, 보낸 편지도 한 통 없다.

   

이는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도 박승선에게 애정을 담은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은 데서도 확인 된다. 태극기와 음력과 양력이 같이 있는 달력을 보내 달라는 요구마저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하였다. 

이승만이 자기 부인 박승선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면 자주 안부 편지를 부치고, 늘 이용하던 전보도 자주 쳤을 것이다. 거기다가 박승선을 아들 이태산과 함께 하루 빨리 미국으로 불러 들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부인이 곁에 있으면 객지 생활이 외롭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박승선을 불러 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오직 아들 이태산만 미국으로 불러 올 생각만 했다. 이승만이 미국에 온 때는 1904년 11월 28일로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에 도착한지 불과 7개월만에 아들 이태산을 미국으로 불러 들인다. 이승만은 자기 신분도 불확실하여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아들 이태산마저 일찍 불러 들인 까닭은 어린 아들을 미국 학문으로 키우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박승선이 시아버지 이경선 몰래 이태산을 미국에 보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정황이 맞지 않다. 왕처럼 군림하려는 독단적인 성격의 이승만은 평소에도 부인 박승선과 일을 상의하여 처리한 적이 없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의 이해 없이 이태선을 미국으로 불러 들였다면 부자간의 사이가 나빴다는 것이 되고 만다.

   

이승만은 아직은 자신이 도움을 받는 처지라 우호적인척 박용만에게 부탁하여 1905년 6월 4일 아들 이태산을 미국으로 데려와서 처음에는 주미 대리공사 김윤정의 집에 맡겼다. 이승만이 자신의 아들을 선뜻 맡길 정도로 김윤정과 친했지만 나중에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후 교포일지라도 미국 국적을 가졌기에 미국 시민들인,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말도 안 되게 대한제국의 공식 외교 문서로 만들라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평생 김윤정에게 매국노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여름 방학이라 이승만은 휴가 겸 해서 이태산을 데리고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가 자신에게 소개한 필라델피아의 보이드(Boyd) 여사 집으로 찾아가 생활하다가 방학이 끝나자 맡기고 떠났다.16 이태산은 1906년 2월 25일 회충약을 먹기 위해 금식하던 중 디프테리아라는 질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이승만과 박승선을 연결해 주던 유일한 혈육마저 사망함으로써 이승만의 마음은 박승선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이승만이 박승선을 미국으로 부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여러 부분에서 발견된다.

우선 당시에 결혼한 많은 여성들이 성만 있고 이름이 없었듯이 박승선도 처음에는 박씨 또는 박소사라고 불렸지 본명이 없었다. 이승만 부인 박씨는 1917년에야 자기 이름을 박승선이라고 지어서 신고하였다.

그런데 박승선이 자기 이름을 만들고 처음으로 한 일은 갖 태어난 이은수를 양자로 입적시킨 일이었다. 이로 보아 이승만이 박승선을 미국으로 불러서 미국에 가려고 이름을 만든 것이 아닌 점이 확인된다.


또한 이승만이 박승선을 현대 여성으로 변화 시켜서 미국으로 불러 들일 생각이었다면 이태산이 미국으로 오기 전 반년 동안 시간이 있었을 때 박승선이 서양식 교육을 받도록 했어야 정상이었지만, 정작 박승선은 1911년에야 일본 나가사키로 유학을 간다.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 박승선은 개종을 해서 상동 예배당에서 서양인들에게서 영어를 배우며 생활하다가 1910년 이승만이 귀국하자 반갑게 만나러 갔지만 이승만은 차갑게 대했다.


1910년 10월 10일 이승만이 귀국했으니, 6년 만에 남편 이승만을 만난 박승선이 다음 해 1911년에 갑자기 일본 나카사키로 학교를 다닌다며 떠났다가 몇 달만에 돌아 온 일은 이상하다. 물론 1911년은 또한 귀국한 이승만이 독립운동은 커녕 전국 여행이나 다니던 기간이었다. 5월과 6월에 한 달 넘게 서울 YMCA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협동총무와 함께 전국 순회전도에 나선 시기이기도 했으니 불가피하게 몇 달 떨어져 지내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승만은 서울 YMCA 건물 3층에서 먹고 자고 하다가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버렸다.

1923년에서 1924년까지 2년 동안 이승만이 쓴 가계부를 보면 지출 항목에서 자기 부인 박승선을 위해서는 단 1센트도 쓰지 않았다. 

이유 없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 젊은 아내 박승선은 돈 나올 데도 없는데도 술로 재산을 탕진한 늙은 술 중독자 시아버지를 끝까지 봉양하다가 사망한 뒤에는 시집 간 시누이가 둘이나 있어도 연고자로 나서서 혼자서 장례를 치루고, 평산군 신암면에 있는 6,000평이나 되는 묘역을 팔아 치우지 않고 고스란히 소유주를 남편 이승만으로 해서 이전해 놓고서22 33년을 더 수절하며 기다리다가 끝내 배신당할 정도면 며느리와 아내의 도리를 다 하고서 이승만의 마음이 돌아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기독교인 이승만은 집에 생활비 한 푼 보내기는 커녕 하와이 교민들이 주는 독립 자금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과부 프란체스카와 바람을 피우다 박승선과 이혼도 하지 않은채 프란체스카와 결혼식도 하면서 이중 결혼을 해서 미국에 결혼신고를 따로 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

기독교에서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죄악이다. 기독교인 이승만에게는 아내 이외에 여자를 탐하여 음란을 일삼았으니 죄악이고, 천주교 집안 프란체스카에게 있어서도 남의 아내만 탐한다고 10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 남편을 탐해도 10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을 자처하던 이승만은 한인기독학원을 건립한 후 날마다 진행한 채플 설교 시간에 한인 남자는 한인 여자와 결혼해야 하고, 한인 여자는 한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강조한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배하고 말았다. 이는 이승만 자신이 정한 한인기독학원 지침 가운데 두번째 항목인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마저 어긴 것이다.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이 법적 혼인 상태로 법적 부인이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25살의 나이 차이를 무릅쓰고써 이중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승만이 노총각 행세를 하며 프란체스카를 속였다는 소리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승만은 4.19 시민혁명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언론을 통제하여 자신이 이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감추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이중 결혼을 하고도 숨겼기 때문에 국민들은 무려 1년 동안이나 이승만의 불륜 상대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법적 부인인줄 알고 영부인으로 인정하며 속은 것을 생각하면 분노할 일이다. 현대사에서 불륜녀를 영부인으로 내세워 국민을 속인 대통령은 이승만이 전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1948년 8월 15일부터 1949년 8월 27일까지는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은 박승선이다.

해방이 되어 귀국한 이승만 곁에는 서양 여자가 다정하게 서 있었다. 박승선이 들인 양자 이은수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 이승만을 만나러 돈암장에 찾아 갔으나 비서 임영신의 훼방으로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949년 5월 16일 이승만은 이기붕에게 시켜 친족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피고들의 주소지가 파악되지 않아서 궐석재판으로 진행하여 원고 이승만 승소 판결을 내리고 이승만의 호적에서 부인 박승선, 양아들 이은수와 손자 손녀 등 7명을 모조리 제적시켰다고 당시 담당 판사 한격만이 언론에 밝혔다.그런데 한격만은 박승선이 재혼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재혼을 하려면 먼저 이승만의 호적에서 이혼사유로 제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박승선은 이승만이 몰래 박승선을 호적에서 제적하기 전까지 이승만의 법적 부인이었다.가족들 모르게 자신의 호적에서 가족들을 제적시킨 이승만은 1949년 8월 28일 일체의 가족관계를 법률상 말소 시키고 종로구 이화동 1번지로 호적을 전적한 다음, 이듬해 1950년 4월 프란체스카와의 혼인신고를 종로구청에 하였다.박승선은 서울시 숭의동에 있는 양아들 이은수의 13평짜리 집에서 손자 손녀들 7식구와 함께 살다가 9.28 수복 2일전 북한 인민군이 살포한 유인물을 찢어버렸다는 이유로 끌려 간 후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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