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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여자, 한국정치인들의 애정행각 실상전모 [03]
  • 편집국
  • 등록 2020-11-23 16:24:02
  • 수정 2020-11-30 10: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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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총리의 여자, 한국 최초의 여성 순교자 장정온


장면총리메리놀 수녀회 장정온(악니다) 수녀는 시대를 앞서 간 수도자인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장면(요한 세례자) 제2공화국 국무총리의 동생으로 메리놀 수녀회 사상 최초의 동양인 입회자였고 한국 최초의 본토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초대 원장이었다. 1925년 평양지목구에 파견돼 25년 넘게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성소를 실천했고 6ㆍ25 전쟁 중 순교한 인물이다. 

   

   

동양인 최초로 미국 메리놀 수녀회 입회

   

장정온 수녀는 1906년 11월 12일생이다. 출생지는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전동(현 인천광역시 중구 전동). 당시 인천 해관에서 세무 관료로 근무하던 장기빈(레오)과 황 루시아의 3남 4녀 중 넷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어려서부터 모든 언행이 나무랄 데 없었고 순명과 정직하며 인내가 특히 뛰어났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그의 가족은 1915년 서울 정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숙명여고) 보수과를 다녔고 1922년 3월 졸업했다. 그해 5월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추천으로 언니 장정혜(구네군다), 오빠인 장면 전 총리의 처조카 김교임(마르가리타)과 함께 미국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했다. 

   

장 수녀가 수련소에 들어갈 때의 일화는 지금도 전해 온다.

   

“왜 수도 생활을 하려 하는가, 또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고, 내 나라, 내 민족을 돕고 싶다”면서 “어떤 일이든지 하고 싶다”고 답변했다. 장 수녀는 1922년 8월 미국 뉴저지 주 메리놀 수녀회 본원에서 ‘악니다’라는 수도명을 받고 착복식을 했다. 하지만 언니 장정혜는 도중에 수도생활을 포기한 뒤 귀국했고, 장 수녀는 1925년 4월 30일 김교임 수녀와 함께 첫 서원을 한 뒤 그해 10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평양지목구에서 선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첫 소임지 의주본당에서 어린이들과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메리놀회 수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통역을 담당했다. 

   

한국인 선교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한 제2대 평양지목구장 존 에드워드 모리스(한국이름 목이세) 몬시뇰은 1931년 초 영유본당 관할 구역에 있던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지부장 제노베파 수녀)에 새로운 한국인 수녀회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메리놀 수녀회는 그해 7월 평양 관후리성당 근처 상수구리(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동) 257번지의 기와집 두 채를 구입, 수녀원으로 개조했다.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을 맞아 설립자 모리스 몬시뇰 주례로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수녀회를 설립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출발이다. 


▲ 1921∼25년 미국 맨해튼대학에서 영문학과 함께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공부하던 장면 박사와 함께한 장정온 수녀.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발, 장면, 김교임 수녀, 장정온 수녀. 

▲ 1916년 큰오빠 장면이 혼인한 직후 장정온 수녀 일가의 가족 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면 박사, 부인 김옥윤 여사, 부친 장기빈옹, 둘째 오빠 장발 전 서울대 미대 학장, 언니 장정혜, 어머니 황 루시아와 여동생 장정순, 조모 박 구네군다와 남동생 장극 서울대 공대 교수, 조부 장치응, 장정온 수녀. 사진 출처=「건국ㆍ외교ㆍ민주의 선구자 장면」 



여러 기도문·영적 도서 번역해 수도자 교육


새로운 수녀회 교육 담당자로 선발된 장 수녀는 일본 도쿄 성심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문학을 전공한 뒤 1935년 9월 귀국해 지원자들의 지도 수녀를 맡았다. 1938년 2월 교황청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설립 및 회헌 인준을 받게 되자 장 수녀는 그해 6월 초대 수련장을 맡았다. 당시 장 수녀는 말보다 실천적 모범으로 회원 양성에 열성을 다했고, 여러 기도문과 영적 도서를 번역해 수녀들의 기도 생활에 도움을 줬다. 특히 장 수녀가 초창기 수련자들을 가르칠 때 표어로 삼은 말씀은 ‘마음을 드높여’(Sursum Corda)였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께 향하라”는 이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영적 기반이 되고 있다. 

   

전쟁 중 혼란 속에서 수도회 활성 위해 노력


1941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메리놀 외방 선교회 회원들이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자 당시 평양대목구장 윌리암 오세아 주교는 한국인 수녀회 장래를 위해 같은 한국인인 장 수녀를 원장으로 임명했다. 태평양 전쟁 와중에 메리놀회 동료들을 떠나 보낸 장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회원 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장 수녀는 특히 수녀들의 영신 생활과 전교 활동을 돕기 위해 회지 「마음을 드높여」(Sursum Corda)를 창간, 매달 2회 발간하면서 수녀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고, 각자의 사도직에 파견돼 있으면서도 수녀들의 마음을 모원으로 향하게 했다. 오랫동안 메리놀 회원들과 떨어져 지내던 장 수녀는 1946년이 돼서야 남한에 진출한 메리놀 회원들을 통해 미국 본원과 연락하면서 경제적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장면총리 가옥 

1949년 5월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를 비롯해 성직자들이 체포되면서 사태가 급박해졌다. 게다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본원으로 쓰고 있던 서포 본부 건물을 양도하라는 북한 당국의 강요로 공동생활이 힘들게 됐다. 장 수녀는 1950년 5월 14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임시 해산했다. 그때까지 본당 신부가 체포되지 않은 분원의 수녀들은 분원으로, 본당 신부가 체포된 분원의 수녀들은 자신의 본가로 귀가하도록 한 뒤 강성효(베드로) 수녀에게 뒷수습을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그해 6월 미국 본원으로 올 것을 준비하라는 메리놀 수녀회 총장 골룸바 수녀의 편지를 받고 월남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수녀원 해산 직후 병원에 입원해 디스크 수술을 받은 장 수녀는 진남포본당에 갔지만, 그해 6월 25일 진남포본당 주임 조문국 신부가 체포되고 전쟁이 일어났다. 장 수녀는 강성효 수녀, 변대옥(헬레나) 수녀와 함께 서포에서 멀지 않은 용궁리 회장 집에 머물다가 영유본당 관할 송림리공소 회장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4일 오후 7시 장 수녀는 인민군 장교 2명과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다. 디스크 수술로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끌려간 장 수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빠인 장면 박사가 유엔에서 북한의 종교 박해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기에 오래 생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장 수녀의 시신을 서포 우물에 밀어 넣는 것을 보고 밤에 시신을 꺼내 근처에 매장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여자들

“10.26 시해사건 대통령의 사생활이 문제였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대통령이 살해된지도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10·26은 역사가 아닌 현실”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가운데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자신의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를 통해 밝힌 박정희의 여성편력이 실려 있어 관심을 끈다.

   

안동일변호사는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사생활의 치부를 들어내는 간행물의 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좋지 않은 과거를 끄집어내려고 쓴 책이 아니다. 최근 일고 있는 박정희와 김재규의 재평가 움직임과 관련해 정확한 자료를 제공하는 게 첫째 목적이고, 둘째 목적은 우리 현대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든 대사건의 공판조서를 토대로 기록을 남겨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다. 정치적인 의도는 없다.”고 단언하가도 했다. 

   

‘궁정동을 거쳐간 박정희의 여자가 200명이 넘는다’. 김재규가 안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는 말이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한사코 밝히기를 꺼렸던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 변호인 접견을 통해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자신뿐만 아니라 박선호(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사형집행)가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대해 진술하려는 것도 막았어요. 1979년 12월11일 제4차 공판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박선호가 ‘그날(10월 26일) 오후 4시경 (여자를 데리러) 프라자호텔에 간 일이 있느냐’고 묻자 ‘예’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등에 대고 ‘야, 얘기하지 마’ 하고 짧게 명령조로 말했죠. ‘호텔에 간 것은 그날 연회장에 보낼 여자를 구하러 간 것이냐’는 변호인 신문이 이어졌지만, 박선호는 김재규의 뜻에 따라 ‘상상에 맡기겠다’고만 대답했어요.” ...(중략)...

   

"당시 웬만한 연예인은 다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김재규에게서 언제 처음 박정희의 여성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김재규는 항소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 ‘박정희를 두 번 죽일 수 없다’면서 그 얘길 꺼내지 않았죠.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80년 2월19일 접견 때 항소이유보충서에도 차마 담지 않은 얘기를 뒤늦게 털어놨어요. 박정희의 치부를 공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역사의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 어렵게 입을 뗀 거죠. 그날 그럽디다.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를 찾아오는 빈도가 높았고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고. 상대하는 여자로는 영화배우와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해요. 그 숫자가 200명을 넘었대요.”

   

궁정동 안가 술자리는 대통령 혼자 즐기는 소행사와 10·26 그날 밤처럼 경호실장, 중정부장 등 3, 4명의 최측근이 함께하는 대행사로 나눠졌다고 한다. 대행사에서 박정희가 맘에 드는 여성을 ‘뽑아’ 따로 즐기는 일을 소행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행사는 월 2회, 소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합디다. 박선호는 말이 의전과장이지 궁정동 안가를 관리하고 소·대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에게 쓸 만한 여자를 찾아내 바치는 게 주임무였습니다. 김재규는 ‘박선호가 자식 키우는 아버지로서 할 일이 못 된다며 몇 번이나 내게 사표를 냈는데 만류했다’고 하더라고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누가 맡느냐’면서.” ...(중략)...

   

“박선호는 항소심 최후 진술에서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를 잠깐 언급했어요. 전날 공판에서 ‘그 집(궁정동)이 사람 죽이는 집이냐’는 검찰관의 신문에 열 받은 박선호가 박정희의 여자 이야기를 하려고 작심했는지 언성을 높였어요. ‘(궁정동을 다녀간 여배우들의) 명단을 밝히면 시끄러워지고 궁정동 안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밝히면 세상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진술하자 재판부가 다급히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말하라’고 제지했죠.

   

김재규는 ‘박선호가 법정에서 한 증언이 죄다 사실’이라고 합디다. 당시 웬만한 연예인은 다 대통령에게 불려갔다는 거예요.” ...(중략)...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변호사
모녀도 같이... 예쁘장한 여군도...

   

세간에 널리 알려진, 그러나 ‘헛소문’ 취급을 당했던 영화 속 ‘연예인 모녀’ 이야기에 대해 김재규는 안 변호사에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고백했다.

   

“딸이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된 사실을 알게 된 모 여배우의 어머니가 박선호를 찾아와 ‘아랫사람들이 대통령과 내 딸이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항의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우리 딸이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더랍니다. 아마도 그 여배우 어머니는 든든한 ‘빽’ 하나 생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 대통령의 품에 안겼으니 톱스타 되고 출세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항간에 ‘간호장교’ 이야기도 떠돌았는데요. 

   

“군 병원의 간호장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해요. 사단과 군 병원 등에서 ‘괜찮다’ 싶은 여군이 있으면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여 대통령 수발을 들게 했다는 거죠. 그게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세상에 어떤 여자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런 자리에 불려나가는 걸 달갑게 여기겠어요. 더군다나 궁정동 안가에 도착해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협박성 주문도 뒤따랐고요.” ...(중략)...

   

"박근혜가 지방 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김재규는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 외에도 박근혜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박근혜가 지방 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딸이라도 그렇지, 국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국민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제게 되묻기도 했어요. 촌로들이 그렇게 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걸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부추겼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불미스러운 사생활과 자식들에 대한 맹목적 보호가 도를 넘었다’고 했어요. 그런 것들이 국정운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여자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 어쩌나’ 하고 늘 고민했다고 합디다.”

   

당시 김재규는 육사 생도이던 박지만의 행동거지에도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딱 한 가지 사실을 왜곡한 게 있어요. 김재규가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를 제 책에 옮기면서 한 단어를 고쳤거든요. 김재규는 지만군 문제를 지적하면서 ‘육사 2학년 때부터 서울 시내에 외출해 여의도 등지에서 사관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OO’을 하고 다녔다’고 썼어요. 김재규는 ‘OO’이라고 했는데, 이걸 제 책에선 ‘행동’이라고 옮겨 적었어요. 이제 지만씨도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OO이라는 단어는 뺐어요. 제가 그렇게 고쳐도 하늘에 있는 김재규가 ‘잘했다’고 할 것 같아, 고민고민하다 마지막에 고친 겁니다.”...(중략)...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박정희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고 법정에서 여러 차례 진술한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의 특별한 만찬은 절대군주나 봉건영주 시대가 아닌 20세기말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개탄했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진시황의 아방궁도 아니고. 현대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중략)...

   

안 변호사는 “책을 펴내 26년 동안 미뤄둔 숙제를 해치운 기분이 든다”며 홀가분해했다.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쐈다”고 말한 김재규는 변호인 접견에서 살해 동기에 대해 “독재와 야당 탄압, 부산과 마산의 시민항쟁,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그에 따른 판단력 마비가 또 다른 이유였다”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후략)... 


이러한 일련의 추문들이 김재규의 진술을 통해 알려진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하나의 의혹들이 실체가 되어 충격을 준 것은 기히 사실화 되어 있는 첫 부인 김호남여사와 이화여대 출신의 재원이었던 이현란, 영화배우 김삼화, 윤정희 탤런트 한혜숙 등의 시건이다. 


박정희의 첫 여자 김호남, 그는 누구인가 ?


김호남(金好南, 1920 ~ 1990[1]). 1936년부터 1950년까지 박정희의 부인었으며, 박재옥에게는 친어머니다. "박정희의 부인"을 육영수로 아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박정희는 육영수와 재혼한 몸이다. 즉, 첫 부인 김호남과 갈라섰다는 얘기다. 이런 내력을 알고도 이경령, 육영수 모녀는 결혼을 밀어붙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첫 부인 김호남, (작고한 박재옥의 생모)그녀의 부친은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과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결혼 당시 (한국 나이로) 박정희는 20세, 김호남은 17세였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10대 후반에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제는 박정희가 김호남과의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시골 빈농 출신으로 대구사범학교[2]에 진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던[3] 박정희로선, 좀 더 나이가 든 뒤에 자신과 맞는 여성과 혼인하길 원했다. 부모와 집안 어른들이 정해 준 여성이 아니라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과 결혼하고 싶었고, 자신처럼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을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 박성빈은 47세에 낳은 막내의 결혼을 꼭 보고 싶어서, "내가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건 보고 가야겠다"며 사실상 반강제로 혼인시켰다. 지금이야 80살까지는 기본적으로 살기 때문에 47살에 아이를 낳아도 충분히 손주를 볼 수 있으나, 당시에는 60살을 살아도 오래 살았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도 박성빈은 박정희가 김호남과 결혼하고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박성빈은 1871년 6월 6일(음력 4월 19일)에 태어나 1938년 양력 9월 4일에 죽었는데 사망 당시의 나이가 67세, 그 당시 박정희의 나이가 21세였다. 박정희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임 교사로 발령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박정희는 경북 문경 심상소학교에서 근무했는데, 물에 빠진 학생을 구출해 내기도 하고 이웃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격의없이 지내 학부형들도 흡족하게 여겼다. 이때 나이가 찬 딸을 둔 학부형이 있었는데, 박정희를 미덥게 여겨 혼담이 나왔다. 

박정희도 좋아하는 눈치였으나, 술자리에서 반 농담조로 "그럽시다"하며 웃고 넘길 뿐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들이 없을 때, 고향에 아내가 있음을 넌지시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혼담이 나오기 전까지 박정희는 결혼 사실조차 말하지 않을 만큼, 반강제로 했던 결혼에 불편함을 갖고 있었다.


김호남은 딸 박재옥을 키우며 시가에서 지냈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시절 여성답게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착한 며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한 박정희는 타지에서 홀로 교직생활을 하며 월급을 김호남에게 준 적이 없었고, 방학이 되어 어쩌다 고향에 내려와도 김호남과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방학 때조차 김호남과 마주치기 싫어, 거의 내려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시절 박정희의 제자들은 "가끔씩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박 선생님을 찾아오곤 했다"고 증언했는데, 바로 박정희의 어머니인 백남의였다. 아들이 내려오질 않으니, 어머니가 대신 올라갔던 셈(...). 이게 해도 해도 너무 심했던지 박정희가 모처럼 고향에 내려왔을 때, 화가 난 셋째 형 박상희가 박정희를 거의 패다시피(...)하며 김호남의 방에 집어넣기도 했다고 한 이후 심상소학교를 사직한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에서 복무할 때에도, 박정희는 새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김호남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광복 이후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평진지대 중대장을 맡다, 귀국한 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한다.

박정희는 1948년부터 총각 행세를 하며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는 한편,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호남은 박정희가 찾아올 때마다 도망치며 거부했다. 이현란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현란은 생전인 1988년에 자유기고가 강인옥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 때 애 낳을 새가 어디 있어? 차라리 애가 있으면 붙잡혀 못 나왔을 거야."라고 했다. 이후 군부 숙군 사업으로 박정희가 투옥된 뒤, 이현란은 박정희를 떠났다. 박정희가 남로당 활동을 한 것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으로,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했다. 그런 마당에 '빨갱이 마누라'가 된 셈이라서 질색해버린 것이다. 6.25 전쟁 때문에 북한이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을 때, 당연히 북한군에 붙었을 줄 알았던 박정희가 국군에 현직으로 복귀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에게 아내와 딸까지 있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육군 소령으로 복직한 박정희는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 혼인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올리기 2달 전, 박정희는 6.25 전쟁 때문에 친척들이 도망치기 바쁘다는 것을 알고 아무도 자신의 이혼을 방해할 사람이 없을거라 생각하면서, 그 기회를 이용해서 김호남을 찾아가 다시금 이혼을 요구했다. 김호남도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혼을 승낙했고,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 봉사하는 보살이 되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1950년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확인이 안 된다. 1993년 방영된 드라마 제3공화국에 출연해 인터뷰한 김호남의 사위 한병기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와 이혼 후 재혼해 아들 1명을 두었으나 얼마 안 가 갈라섰고 이후 절에서 공양주로 있었다고 한다.

   

불교 관련 인사들이 나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박정희 정부에서 불교 교단을 지원해준 연유에서 기인한다. 김호남이 출가한 사실을 알게 된 육영수는 그녀가 머무는 사찰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이를 부담스러워 했던 김호남이 타 지역 다른 사찰로 옮기면 육영수가 다시 행방을 쫓아 그 사찰을 지원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일례로 상무대가 광주광역시에 있을 무렵 김호남이 상무대 내의 진중 사찰 무각사로 옮겨 머물렀는데, 이를 안 육영수가 지원해 줘서, 무각사가 상무대 이전 후에도 지역의 대찰로 남을 만큼 세가 커졌던 것.

   

친딸 박재옥이 사위 한병기와 결혼하고, 그 뒤 전 남편이었던 박정희와 둘째부인이었던 육영수가 1974년과 1979년 김재규와 문세광의 총탄에 사망한지 16년 뒤인 1990년에 뇌출혈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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