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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여자, 한국정치인들의 애정행각 실상전모 [04]
  • 편집국
  • 등록 2020-11-23 16:31:42
  • 수정 2020-11-30 10: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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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두 번째 여자 이현란과의 사랑, 박정희의 혼자만의 사랑이었나?

이현란, 박정희 서거소식에, 무덤덤 한 말투로,“인연이 아니었던게죠.” 


박정희의 전(前) 내연녀. 광복 이후 박정희가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만나,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함께 했던 약혼+사실혼 관계의 인물이다. 왜 두 사람이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하고 사실혼 관계로 지냈는지......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박정희의 여자 이현란역을 맡아 열연한 탤런트 김애경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이다. 그녀의 부친은 부유한 지역유지였다. (원산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부자였다고도 한다) 전답과 임야 뿐 아니라, 항구도시인 원산에 걸맞게 다수의 어선도 소유했던 재력가였다. 

   

이현란은 원산시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개신교 미션스쿨인 루시고등여학교[2]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로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광복을 맞이했는데, 이후 역사의 흐름은 이현란의 인생을 극적으로 뒤집어놓게 된다.

   

지역의 유력자란 이유로, 이현란의 부친은 북한 정권에 의해 부르주아 반동으로 몰렸다. 결국 전답과 임야, 어선은 물론이고 집을 포함한 전재산을 북한 정권에 몰수당했다. 이현란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간신히 일가 친척의 행랑채에 신세라도 지면 다행이었다. 보통학교 교사였던 이현란은, 루시고녀 스승의 부인인 기쿠에(菊惠) 여사와 함께 무작정 서울을 향해 떠났다. 그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혈혈단신으로 생활하게 된다.

   

월남한 직후인 1947년 10월, 이현란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부 아동교육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이현란의 성적표에 따르면, 율동 과목의 점수가 높았다고 한다.

   

이현란은 이렇게 당시로서는 드물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큰 키에 늘씬하고 서구적이며 화려한 외모의 미인이었으며, 성격 또한 활달하고 발랄한데다 애교가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와의 이현란 운명적인 만남


1947년 가을 춘천, 이현란은 루시고등여학교 동문인 고금옥의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맡았다. 신랑은 박경원 대위였고, 신랑 들러리는 김점곤 대위였다. 또한 박경원 대위와 친하게 지내던 박정희 대위도 하객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이어진 피로연에서, 신혼부부와 하객들은 모두 함께 즐겁게 놀았다.

   

박정희는, 동료이자 이현란의 6촌 오빠 이효(李曉) 대위에게 부탁하여 이현란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결국 1948년 6월부터 두 사람은 교제를 시작했다.

   

약혼은 이효(李曉) 씨의 부인이 먼저 와서 박정희와 약혼하자고 했다고 한다. 양쪽에서 부추기고, 부모님도 없고 의지할 데가 없는 형편에 박정희가 2학년 1학기 학비 7,500원도 대신 납부해주고 '키는 작았지만 박력있고, 침착하고 나(이현란 자신)에게 잘하니까' 여자로서 끌렸고, 결국 약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혼식도 옷도 제대로 못입고, 화장도 안 하고 피아노책 구입하려고 독일에 간 친구랑 기숙사에 나오는데 박정희가 '이의없죠?'하길래 부끄러워 대답 못 하다가 그것이 수락한 것이 되었고, 독일 간 친구와 같이 박정희를 따라가 보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있었고 명동의 한식집에서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용산 관사에 방을 합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란은 어린 마음에 창피해서 '약혼식 소식은 친정에 안 전했다'고 한다. 

   

교제한 지 2달이 지난 1948년 8월, 박정희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서울 용산의 옛 일본군 장교 관사가 대한민국 육군에 불하되어, 박정희도 소령 진급과 함께 관사를 배정받았다.

   

이현란은 이북에서 홀로 월남하여 의지할 곳이 없었다.학기 중에는 학교 기숙사에 살았으나, 방학 때는 기숙사를 비워주어야 했다. 친구의 집에 신세를 질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 박정희를 알게 되었고 약혼하고 결혼을 전제로 용산 관사에서 동거하기 시작했다.

   

신랑 들러리였던 '김점곤' 대위는 몇 개월 후, 박정희 소령의 관사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과 함께 들러리를 했던 이현란이, 박정희 대위와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사실혼에 들어갔으므로, 금혼 규정이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학칙에 따라 이현란은 중퇴로 처리되었다.



박정희는 왜 이현란에게 집착했을까?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살이던 1936년에 16살의 김호남과 결혼, 이듬해인 1937년에 딸 박재옥을 낳았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당시 대개 그러하듯 부모와 집안 어른들의 의사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대구사범학교[8] 재학 중이었고, 출세에 대한 야망이 컸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박정희를 낳은 부모[9]는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것을 봐야겠다"며 박정희를 친구의 딸 김호남과 결혼시켰다. 김호남은 집안 살림을 잘 돌보고 시어른들과 시가 식구들을 잘 모시는,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정해 준 아내에게 박정희는 정을 주지 않았다.

   

박정희는 본처 김호남에게 철저하게 무심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경상북도 문경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방학 때 집에 와서도 김호남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예 집에 오지 않기까지 했다고 한다. 보다못한 셋째 형 박상희가 모처럼 집에 온 박정희를 억지로 김호남의 방에 밀어넣기도 했다. 만주군 장교로 복무해하던 시절에도 김호남에게 안부를 전한다든지 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서울에 머물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박정희는 고금옥의 결혼식에서 이현란을 처음 만났다. 박정희는 이현란이 머물고 있는 대학 기숙사에 찾아가기도 하다가, 동료 이효(李曉)[10] 대위에게 부탁하여 이현란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결국 1948년 6월부터 두 사람은 교제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현란과의 결혼을 염두에 뒀던 박정희는, 고향에 사람을 보내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당시에는 이혼하려면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출석하거나, 이혼의사를 확인하는 문서에 직접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러나 김호남은 서울에서 이혼서류를 든 사람이 찾아올 때마다 도망쳐버렸고, 결국 박정희는 서류상 이혼을 할 수 없었다.

   

교제한 지 2달이 지난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박정희가 근무하던 경비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와 함께 서울 용산의 옛 일본군 장교 관사가 대한민국 육군에 불하되어, 박정희도 소령 진급과 함께 관사를 배정받았다. 군국주의의 정점을 찍던 옛 일본제국의 장교 관사답게 시설은 좋았다고, 마침 방학이 시작되고 기숙사의 방을 비워야 했으며 돈은 떨어져가고 부모님은 모두 북한에 있어 의지할 곳없던 이현란에게 있어서 박정희는 의지가 되었던 것 같다.

   

박정희와 이현란은 간단한 약혼식 후,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했다. 이현란과 사실혼 관계로 지내는 중에도 박정희는 김호남과의 법적 이혼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역시 김호남이 도망쳐버려 실패했다.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김호남과 박재옥의 존재를 철저히 함구했다. 그에 비해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푹 빠져 그녀를 무척 사랑했었다.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이현란에게 꼬박꼬박 존대했고, 술을 싫어하는 이현란을 위해 술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인 구미에도 한번 데리고 가서 가족들에게 인사를 시킨 적이 있는데 구미에서는 서울에서 멋쟁이 아가씨가 온다고 떡을 준비하고 새 옷을 해 입는 등 나름 준비해서 반겼으나 이현란이 박정희의 낡디낡은 생가를 보고 기겁하여 하룻밤만 자고 도로 올라왔다고 한다. 나중에 이현란은 '기어 들어가서 기어서 나오는 집'이라고 박정희의 집을 묘사했다.



박정희의 파국, 그리고 이현란과의 이별 


그러나 박정희는 이현란과 오래 가지 못했다. 동거를 시작한지 겨우 2달이 지난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져버렸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이던 박정희는 전라남도 광주시에 설치된 토벌사령부에 작전참모로 급하게 차출되었다.

   

여순사건의 진압은 마무리됐으나, 곧 군부에는 대규모 숙군이 시작되었다. 남로당 군사부에 포섭되어 활동하던 박정희도, 결국 김창룡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체포된다.

   

이현란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이효(李曉) 대위가 술에 취해 찾아와 돈을 얼마 쥐어주면서 '당분간 기다려라. (박정희는) 갑자기 출장갔다.'고 말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밤새 '메모나 전화'가 왔을텐데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강문봉 대령 부인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강문봉 대령에게 처음 접했다고 한다.

   

"너무 기가 막혀. 지금도 가슴 떨릴 정도로 쇼크 받았어요. 많은 사람이 관사에 왔다 갔다 했어요. 나이는 어리고 의지할 데가 없어 나(이현란)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현란의 입장에서는 뇌진탕이 일어날 수준의 쇼크를 받아도 아무 이상함이 없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난리통 속에 박정희의 인적사항도 드러나버려, 박정희가 극구 함구하던 아내 김호남과 딸 박재옥의 존재를 이현란이 알게 된다.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약혼식까지 치렀는데, 알고 보니 호적상 유부남의 동거녀일 뿐이었던 것이 었다. 이현란은 시장에서 고향 아줌마를 만나 "지금 남자는 결혼경력이 있고 거기다가 빨갱이니"하고 푸념하자 그 아줌마는 ‘그냥 살지, 여자가 뭐…’라고 했다고 한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 주라. 7기생의 육사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도 하고 아침에 국방부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 주더라. 내(박정희)가 얼마든지 차타고 도피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건 나(박정희)한테 얼마나 불리한 줄 아나?’



박정희가 김창룡(金昌龍)을 통해 이현란에게 전한 메모


또한, 박정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곧 죽었다는 설은 줄곧 있어왔다. 여기에 대해 이현란은 생전인 1988년, 자유기고가 강인옥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속은 게 분하기도 하고, 내가 애 낳을 새가 어디 있어? 차라리 애가 있으면 붙잡혀 못 나왔을 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독한 사람인데."라고 했다.[13]

   

그러나, 박정희의 일대기를 추적해 온 정운현 기자는 "박정희가 여순사건으로 특무대에 체포되었을 당시에 이현란이 아들을 출산했으나, 아이는 곧 사망했다"는 증언을 처음 보도했다. 제보자는 박정희와 함께 여순사건으로 체포되었던 김학림(金鶴林) 대위, 그의 아내 강씨가 보내 1999년 1월 19일 편지를 바탕으로서 10년만에 보도했다. 부인 강씨는 당시 박정희와 이현란이 동거하던 이웃 관사에서 살고 있었으며, 남편 김학림과 박정희는 태릉 초가집 동네에서 살 때부터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비밀로 만나는 건 알았지만 (남로당일줄은) 몰랐다고. 남편 김학림이 관사에서 3일 동안 소식이 없이 집에 안 돌아왔었는데, 이현란이 집에 와서 우리 남편(박정희)도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걱정을 하였는데 나중에 체포된 사실을 알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1948년 11월 중순~12월 말 사이쯤 이현란은 광화문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약 6개월 뒤 아들은 병명도 모른채 사망했고, 이현란은 황장군 부인하고 같이 용산 관사의 뒷산에 저녁에 시신을 붉은 상자에 입관(入棺)하여 암매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연루되면서 감옥에 있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아들은 이름도 없었다고 한다. 강씨에 따르면, 이현란은 아들이 죽었을때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하면서 슬피울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석방되어 나온 뒤로도 가출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온 동네를 뒤져 가며 찾는 박정희의 손에 잡혀 오기가 여러차례였다. 이현란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는 박정희를 미워했으나, 나중에 가서는 '무서워졌다고 한다. 일부러 오만정 다 떨어지라고 온갖 진상을 다 부리는데도 입을 꾹 닫고 꿈쩍하질 않고, 이렇게 진상을 부리거나 가출했다 잡혀 온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침밥을 차려놓고 이현란에게 여전히 존댓말로 "식사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고. 나중에는 이현란이 "화장실 간다."고만 해도 쫓아가서 화장실 문 앞을 감시했다고 한다.

   

결국 1950년 2월 6일, 이현란은 술에 취해 잠든 박정희 몰래 나와 '‘그동안 고마웠고 맘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 말고, 날 찾으면 투신자살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 하나만 남겨놓은 채 잠적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그녀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1949년 8월 12일,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충격으로 사망했다. 옥중에 있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 실력을 인정받았던 군대에서도 쫓겨났으며, 약혼녀마저 가출한 박정희는 이 무렵을 어렵게 보냈다.[15]

   

이현란과 이별한 지 딱 4달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박정희는 다시 소령 계급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당시 박정희는 후퇴하는 정부를 따라 경상북도 대구시까지 내려갔는데, 여기서 마침 대구로 피난왔던 이현란과 우연히 마주친다. 이미 결혼하고 임신 2개월이던 이현란은 대구 시내에서 원피스 입고 모양내고 싹 빼고 가는데 지프차가 빵빵대는 소리가 돌려돌아보니, 지프차에서 군복을 입은 박정희가 내리려고 하자. 그 바람에 이현란은 박정희가 또 데리러 온 줄 알고 부리나케 도망쳐버렸고, 이후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마주친 적이 없었다. 북한 정권이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전국을 석권했던 시점에서, 이현란은 박정희가 당연히 북한에 가담했을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 육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이현란은 '사변통에 월북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돌아다보고 깜짝 놀랐어요. 박씨(박정희)가 내리려고 해서 나 살려라 하고 뛰었지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현란의 생애는 비극함, 그 자체였다. 

   

박정희와 헤어진 후로 이현란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모 여고에서 잠시 교직생활을 했다. 이때 새로 사귀게 된 남성도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지인들과 이현란의 평에 의하면 "착실하고 순진하며 진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현란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랑을 소설화 한 이병주작가
얼마 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이현란이 살고 있는 하숙집으로 찾아와 함께 피난을 가자고 제안했고, 둘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이 남자가 이현란에게 청혼했다. 이현란은 솔직하게 박정희와 동거했던 사실을 밝혔는데, 그럼에도 남자 쪽에서 개의치 않고 추진해 결국 대구시에서 결혼했다. 박정희 역시 대구에서 결혼한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호적상 부인 김호남이 있음을 밝혔는데도 육영수가 개의치 않고 결혼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우연이다.

   

전쟁이 끝난 뒤로도 이현란의 남편은 경상북도 의성군과 서울에서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하였다. 이후 이현란은 평범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낳고, 남편에게도 사랑받으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인터뷰에서, 이현란은 10.26 사건을 뉴스에서 전해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뉴스를 듣던 때가 식사 중이었는데, 체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이 그릇을 다 비웠다고 한다. 이현란의 오랜 친구는 그 얘길 들으며 "너 참 독하다"고 혀를 찼다고. 이후 강인옥과의 인터뷰에서도 "그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요."라는 깔끔한 한 마디로 인터뷰를 끝마쳤다. 이후의 거취는 불명. 1992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19]

   

MBC 공화국 시리즈 중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에 극화되어 등장했으며, 둘 다 탤런트 김애경이 이현란 역으로 출연했다. 다만 <제2공화국> 때는 어른의 사정으로 실명을 밝히지 못해 '이 모 여인'으로만 소개되었고, <제3공화국> 때는 실명 그대로 나왔다. 

   

소설가 이병주는 이현란과 박정희의 이야기를 소설화 하여 "그를 버린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내놓은 바 있다. 



박정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불운의 여배우 김삼화의 전모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6세부터 무용을 시작하여 조선무용연구소 한성준에게 사사했으며, 성신여중 재학 당시 15세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 특사 환영연회에서 공연을 하는 등 “천재 소녀 무용가”로 불리며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5년 김기영 감독 양산도에서 주연을 맡으며 영화 데뷔를 했다.


영화배우로 활약할 당시의 김삼화

특기인 무용을 선보인 논개, 한홍합작 영화 이국정원, 궁중여인으로 분해 엄앵란과 칼싸움 활극을 선보인 대도전 등 15편 안팎의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데뷔 이후에도 김삼화무용연구소를 운영했고, 드라마센터의 한강은 흐른다로 1962년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지적인 배경과 거침없는 언사로 영화가의 독설가로 불리기도 했다.


박정희가 성폭행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사후 이야기도 없는 불운의 여인이다.“ 이상은 나무위키에 적시된 영화배우 김삼화에 대한 기록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는 내용들이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다음은 김현철이라는 재미언론인이 미국에서 발행되는 『한겨례저널』에 썼던 칼럼이다. 미국으로 이민 갔던 영화배우 김삼화를 인터뷰한 자료를 근거로 썼던 칼럼인데, 지난 대선에서 문제가 되어 검찰이 내용을 허위로 판단, 트위터에 올린 이들을 기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김씨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6세부터 무용을 시작하여 조선무용연구소 한성준에게 사사했으며, 성신여중 재학 당시 15세의 나이로 미국대통령 특사환영 연회에서 공연을 하는 등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5년에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에서 주연을 맡으며 영화데뷔를 했다. 촉망받던 여배우로 활동하던 김삼화는 결혼하여 아들을 둔 유부녀였는데, 청화대 채홍사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각하께서 모셔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잠깐 청화대에 다녀오시게 화장하시고 15분 이내로 떠나실 준비를 하세요." "이제 갓난애의 엄마로서 신혼 유부녀입니다. 홀로 있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저는 좀 빼줄 수 없을까요?"하고 애원했지만, "잠깐 다녀온다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하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한 채홍사의 자세를 보고 더 반항했다가는 자신도 또 영화제작 스텝인 남편도 당장 영화계에서 매장될 것을 안 여자는 순순히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안내된 곳은 청화대가 아닌 궁정동 안가였고, 그 다음날 새벽까지 각하의 성노예가 되었다. 한 달이 지난 뒤, 남편과 강제로 이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각하는 한밤중에 여인과 몸을 섞고 나서 부자 미국인을 소개할 테니 당장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 살라고 명령했다. 박정희 에 의해 강제로 미국으로 쫓겨난 김씨는 박정희의 상습적인 성폭력의 두려움으로 평생 고통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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