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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여자, 한국정치인들의 애정행각 실상전모 [05]
  • 편집국
  • 등록 2020-11-23 16:39:16
  • 수정 2020-11-30 10: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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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희대의 풍운아 정일권 전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집권 기간 중 고위직으로 장수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정일권(1917~94년)씨일 것이다. 5·16혁명 때 주미대사였던 정씨는 외무부 장관(63~64년, 66~67년 겸직)→국무총리(64~70년)→공화당 의장서리(72년)→국회의장(73~79년) 등 대통령을 제외한 최고위직을 가장 오랫동안 누렸던 인물이다. 박 대통령은 그의 어떤 점을 높이 산 것일까. 박 대통령은 그때그때 당신이 필요한 부분을 충족해 주는 사람들을 측근으로 중용했다.


전 국무총리 정일권
정치인 정일권의 생존법

   

김형욱이 저돌적 공격성을 보여줬다면 이후락은 일을 꾸미는 재기가 뛰어났고 김성곤은 돈과 조직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정일권은 이들과 비교해 딱히 이렇다 할 장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관운(官運)이 특별한 건 분명했다. 무슨 일을 시키더라도 무난하게 처리하고 요령도 좋았다. 속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기가 막히게 점잖고 온화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한테 인상 좋은 사람으로 비춰졌다. 자리에 대한 집념이 강했지만 대통령 친위부대들의 경계 대상이 될 만큼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정일권은 ‘대통령 자리를 넘겨다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대방한테 권력욕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김형욱·이후락이나 김성곤의 공화당 4인방은 그를 위험시한다거나 견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정일권씨는 인생의 위기가 닥칠 만한 지점에서 묘하게 빠져나가 자리까지 얻어 가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곤 했다. 70년 3월 17일 밤 11시 서울 절두산 앞 강변도로에 서 있던 코티나 차량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25세 여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여인은 고급 요정 선운각(仙雲閣) 출신의 호스티스 정인숙. 정인숙은 운전기사 역할을 하던 오빠 정종욱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발표됐다. 오빠가 동생을 죽였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건 수사를 경찰이나 검찰 형사부가 아니라 간첩·정치 사건을 다루는 서울지검 공안부(부장검사 최대현)에서 담당한 게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시중엔 정인숙의 세 살배기 아들 성일이가 최고위 권력층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정인숙이 미국과 일본을 드나들며 사용한 회수여권(지금의 복수여권)을 국무총리실 비서관이 주선했고, 그 신원 조회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이 직접 담당할 정도로 특별대우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급기야 그해 5월 국회 본회의에선 신민당의 유진산 당수, 조윤형·김상현 의원이 정일권 총리를 앞에 두고 “지금 세상에선 성일이의 아버지가 정 총리라고 한다” “정 여인에 관계된 사람이 26명이 되고 박정희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라는 얘기가 돌아다닌다”고 불을 질렀다. 정인숙 사건은 그해 정치권을 뒤흔든 대형 스캔들이었다.


박 대통령 얘기가 떠돌았던 건 전적으로 정 총리와 정 여인의 처신 때문이었다. 정인숙이 죽기 수개월 전부터 서울 정가와 워싱턴·도쿄의 한국 대사관 안팎에선 ‘정 여인의 뒤를 누가 봐주고 있느냐’를 놓고 쑥덕공론이 일었다. 정 총리는 이 문제가 나올 때마다 “난 괜히 억울하게 오해받고 있다. 다른 분이 관계 있는지 모른다”며 넌지시 박 대통령을 암시하곤 했다. 정 여인의 떵떵거리는 위세 역시 아이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이 당시 정인숙사건에 대한 뉴스를 집약하면 이렇다.



정인숙 살해사건(鄭仁淑 殺害事件), 제3공화국 권력치정의 의문사.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부근의 강변3로에 멈취 서 있는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서 권총에 넓적다리를 관통당해 신음하고 있는 한 사내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이미 숨진 한 젊은 여인이 발견되었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당시 34세), 숨진 여인은 정인숙(당시 26세)으로 두 사람은 남매 관계로 밝혀졌다. 

   

나중에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소지품에선 정관계 고위층의 명함 26장이 포함된 33장의 명함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보도가 수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언론은 정인숙에게 숨겨진 아들(정일성)이 하나 있고, 정인숙이 당시 정관계 고위층 전용이라 할 수 있는 고급 요정 '선운각'을 드나들었다는 걸 밝혀냈다. 

   

1주일 후에 나온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범인은 오빠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종욱은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정인숙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으나, 정인숙이 듣지 않고 자신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누이동생을 죽이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정인숙 살해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의혹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성급히 정결지으려는 수사 태도도 의심을 샀고 정종욱이 사용했다는 권총이 발견되지 않았고, 증거는 오직 정종욱의 자백뿐이라는 점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정종욱에 대해선 '권세가들에게 희생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전두환과 X양 사건의 전말 

   

이른바 ‘X양 사건’은 1981년 10월에 벌어진 사건으로 당시 X는 드라마 ‘길’에 출연 중에 방송 펑크를 낸다. 그 일로 납치를 당해 X가 녹화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납치를 한 당사자가 영부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논란일 일파만파 커졌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X를 흠모했고, 이를 질투한 이순자 여사가 X를 납치해 상해를 입혔다는 소문이 확산된 것. 이에 대해 X는 일절 입장을 밝히지 않고 노코멘트로 일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군인출신인데 비해 여자문제에 관한 한 

치부가 없는 편에 속하는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관련 내용은 비교적 많다. 많은 만큼 공개되거나 비공개로 묻혀 있다. 전부인이 승려가 되어 경기도 어느 사찰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비명(非命)에 간 이후 박대통령은 외로웠던지 여자와 가까이 했다. 

   

그래서인지 박대통령이 접촉했다는 여성이야기가 때때로 청와대 밖으로 흘러 나왔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에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던 청와대 내부의 대행사-소행사는 박대통령을 즐겁게 하기 위한, 여자가 참석 노래하고 술 마시는 유흥행사의 하나였다. 박대통령이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가까이 했던 여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명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9년 김형욱 실종 이전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대통령 여자 리스트로 청와대를 협박한 일이 있었다. 결국 김형욱은 그 협박의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그 리스트에 올라 있는 여성의 수는 일반인들에겐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여자 리스트에 올라 있는 여자와 박대통령이 얼마나 깊숙한 관계였는지는 공개된 바 없다. 10.26 박정희 살해 현장에 있었던 두 여자(여대생과 가수)가 회고록을 집필, 그 당시의 상황이 소상하게 공개되어 있을 뿐이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시대는 군인장성 출신 대통령들이어서 인지, 또는 청와대 내부 정보가 철통같이 장악되던 시대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대통령과 관련한 여자 문제는 거론할 사항이 별로 없다.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두 탤런트 관련설 만이 시중에 떠돌아 다녔다. 루머 수준이었으므로 어느 대통령인지 지칭할 필요는 느끼지 않으나, 어느 대통령이 무척 좋아했던 여성 탤런트가 한 명 있었는데 부인이 야만스러운 방법으로 떼어놓았다는 루머수준이 있고, 또 하나는 어느 대통령이 좋아하는 여자 탤런트가 있는데 그녀를 그 대통령이 뒤에서 은밀하게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있다는 수준이었다.



김영삼대통령 희대에 바람둥이 여자소문 무성


김영삼 대통령도 여자 관련 소문이 많다. 대통령 선거 땐 외부로 공개되지는 않지만 후보들의 사생활이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거론되는 인비(人秘)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밝혀진 바 없다.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경우는 심각했다. 김대중 후보 진영의 참모들은 어떻게든지 대선에서 이겨야 한다는 전제 아래 김영삼 사생활을 담은 홍보물을 제작할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김영삼-김대중의 경우는 독재정부 시절, 매일 감시 받던 반독재 투쟁의 선봉장이었기에 감시 자료들이 정략적으로 외부로 흘러 나왔다. 김영삼 경우는 사생활 자료가 많았고, 김대중 경우는 사상관련 자료가 많았다. 

사생활 관련자료의 경우 접촉한 여성의 이름은 물론 날짜와 장소까지 명기되어 있을 정도였다. 한때 김영삼대통령 경우는 대선 당시 “혼외 딸이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고, 그 기사를 보도한 손충무 기자는 수감 됐었다. 

그 사실여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이 정보도 감시정보 속의 하나였는데 이 사건을 포함 김영삼의 여성 리스트는 조작된 부분이 분명히 담겨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이전에 여자관련 이야기가 분분했으나 대통령이 된 이후는 여성관련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은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철저하게 감시 당해온 터여서 사생활도 위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대중의 경우는 더 했다. 박정희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으므로 사생활이 극도로 절제되는 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청와대에 입성하기 이전이나 입성 이후에도 파괴력 있는 여성 스캔들 관련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서울 동교동 집 서재에서 어떤 여자와 가까이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혹은 청와대 내에 좋아하는 여자를 근무하게 했다는, 루머 수준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김영삼-김대중은 같은 시대 정치를 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주로 요정에서 사람들과 어울렸다. 요정엔 으레 여자들이 합석한다. 그래서 스캔들이 만들어지곤 한다. 그런데 김영삼과 김대중이 요정을 함께 이용해도 김영삼은 옆자리에 앉은 여자와의 술자리 스캔들(?)이 외부로 돌아다니고, 김대중의 경우는 함구(?)된다고 한다. 김대중은 팁을 잘 챙겨, 철저하게 돈으로 관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노무현대통령과 여자들

   

노무현 대통령은 50대의 젊은 대통령이다. 자유연애가 어떤 면에서 미덕으로 받아들여진 시대를 살아왔다. 사생활 관련 이야기가 제법 있을 법하다. 노대통령은 5년간의 청와대 임시주인으로 들어오기 이전엔 부산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 당시 친밀하게 지냈던 민주화 동지들 사이에서 유흥과 관련한 밤의 이야기들이 간헐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함께 술 마시던 유흥자리의 여성들 이야기가 화제로 떠오른다. 대선 당시 상대 진영이 고의로 흘린 스캔들성 여성 이야기도 있으나 생략한다. 세간엔 노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이후 어느 가까운 여성을 고위층으로 밀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이야기도 끊임없이 들린다. 기자는 정치인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노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시대는 남녀를 막론하고 이성(異性)으로서의 친구도 있을 수 있는 사회다. 누구에게나 그런 행운이 주어질 수 있는 여건이다. 시골 출신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성공하기까지 숱한 사람과 인연을 맺었을 터인데, 노대통령의 경우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 친구도 더러 있었지 않았겠는가? 

   

이 사회는 샹들리에와 같다. 다면(多面)인 유리알에 빛이 주어지면 서로가 서로를 비추인다. 쉬지 않고. 마찬가지로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고급스럽고 호화스럽게 청와대 내에서 살아온 역대 대통령들과 관련된 여자들의 이야기도 언젠가 국민들의 알권리 몫으로 돌아가리라는 게 기자가 이 글을 쓰는 결론이다. 이 글이 너무 겉만 훑었다고 비난할 독자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정도 이야기라도 글로 읽을 수 있는 것도 민주화된 시대의 행운(?)으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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