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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0-12-02 10:10:24
  • 수정 2020-12-02 13: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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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성악, 최고의 전설적 디바 마리아 칼라스

 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20세기 성악, 최고의 전설적 디바 마리아 칼라스 

 

  

 97년 전 오늘 1923년 12월 2일에 태어나서 – 

 43년 전 1977년 9월 16일에 주검이 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세상을 변했을 것이다 

이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B.파스칼(1623~1662)의 작품 팡세에 나오는 구절이다파스칼은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고혹적인 여인으로 인식했다관능미 넘치는 미모로 남성을 유혹해 절망시킨 요녀로 여겼다실제로 세계제국 로마의 영웅인 시저와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치마폭에서 허우적거렸다.

파스칼은 왜 그녀의 이미지를 코로 상징화 했을까이는 미모와 향기로 생각할 수 있다사람을 볼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게 얼굴이다그중에서도 시선은 순간적으로 눈과 코를 스캔한다특히 얼굴의 중심에 위치한 코는 전체적인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아름다움과 부드러움호감 등의 인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그녀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셈이다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남성이 저절로 무너졌음을 시사한다그렇다면 21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에겐 어떤 수식어들이 접사될 수 있을까

 

먼저 칼라스의 이탈리아 무대 첫 데뷔 오페라였던 '라죠콘다’ 4막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자살’ ("Suicidio!" from "La Gioconda" by Amilcare Ponchielli)을 들어 보면 그의 전부가 녹아 있음을 알수 있다조콘다가 어머니도 사라지고 사랑도 떠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격정과 비탄이 녹아 넘치는 최고의 드라마틱 소프라노 아리아이다

그가 바로 97년 전 오늘의 이 세상에 왔음을 알린 날이다

         영화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 포스터 | 네이버영화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로일반적으로 오페라 최고의 디바프리마 돈나를 논할 때 우선적으로 떠올릴만한 인물이다개인으로서의 카리스마예술적 성취화려함과 비극이 뒤엉켜 풍부한 이야기 거리가 담긴 개인사를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라이벌로는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1922 ~ 2004)가 있으며 팬덤의 충돌도 유명했다.

그리스계 미국인으로그리스어 풀네임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카이킬리아 칼로게로풀루(Μαρία Άννα Σοφία Καικιλία Καλογεροπούλου)'. 하지만 예명으로 축약한 이 문서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한 병원에서 그리스 이민자 부부였던 요르고스 칼로게로풀로스(미국으로 귀화하면서 조지 칼라스로 개명)와 에반젤리아 디미트리아두의 1남 2녀 중 막내이자 둘째딸로 태어났다조지와 에벤젤리아 부부의 사이는 유감스럽게도 꽤 막장이었다가족에 별 관심이 없었고 매사에 의욕이 없던 아버지 조지와 아이들의 장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자 했던 어머니 에반젤리아 사이에서 자식들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칼라스의 경우 세 살때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여긴 에반젤리아의 강요 때문에 성악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다.

 

실제로 칼라스의 노래 실력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편이었고뉴욕에서 열린 어린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하지만 칼라스는 훗날 이 시절을 보람없고 지긋지긋한 고생의 나날이라고 부정적으로 회고하며 "그런 짓을 못하게 금하는 무슨 법률이라도 있어야 한다부모들은 자녀들에게서 어린 시절을 빼앗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게다가 아이들에게 성악 공부시키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던 조지도 시도때도 없이 부부싸움을 일으켰고결국 1937년에 에반젤리아가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귀국하면서 별거에 들어갔다.

 

               오드리헵번을 닮고 싶어 했던 마리아칼라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그 동안 휘둘리고 살았던 딸들이 어머니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이번에도 내켜하지 않는 칼라스를 데리고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 원서를 내 오디션을 보게 했다하지만 기초 성악 기교가 전무하다는 이유로 곧장 퇴짜맞았고이어 그리스 국립 음악원에서 두 번째로 오디션을 봤다오디션을 주관했던 성악 교수 마리아 트리벨라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다고 인정하면서도가능성을 훨씬 높게 점쳐 입학 자격을 인정했다.

 

음악원에 입학한 칼라스는 트리벨라의 문하생이 되었는데트리벨라는 다소 어두운 목소리의 질감 때문에 종종 알토 음역이 적합하다는 주위의 평과 반대로소프라노 음역으로 테시투라[2]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훈련시켰다칼라스는 이 과정에서 서양 성악의 기본 창법인 벨 칸토를 상당 수준까지 터득했고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서툴게 불렀던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들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어머니의 치맛바람이 불어닥쳤는데, 1938년에 공식 데뷰 무대에 출연한 직후 전에 칼라스를 거절했던 아테네 음악원으로 편입시킨다며 딸을 다시 데려가 오디션을 보게 했다이번에 오디션을 주관한 교수는 스페인 출신의 '엘비라 데 이달고 였는데교육 활동에 전념하기 전까지는 매우 뛰어난 기교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가수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매우 열정적이고 극적이라고 긍정적인 평을 내렸고노래가 끝나자마자 합격 판정을 내렸다다만 즉시 입학하지는 못했고일단 그리스 국립음악원을 졸업하면 입학시켜달라는 어머니의 요구 때문에 1년 유예되었다아테네 음악원 입학 직전이었던 1939년 4월 2일에는 국립음악원 학생들이 제작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에 산투차 역으로 출연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뷰했다.

 

 

같은 해 가을에 아테네 음악원에서 두 번째 성악 전공을 시작했는데물론 지도 교수는 오디션 때 만났던 이달고였다이달고는 칼라스의 기교가 매우 출중하고 표현력도 훌륭하지만고음역이 약간 모자란다는 판단으로 자신의 콜로라투라 창법을 집중적으로 전수해 주었다국립음악원 시절에도 그랬지만칼라스는 제일 먼저 등교해 제일 늦게 하교하는 일이 예사였고 다른 교수들의 수업도 빠짐없이 청강하는 등 독종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아테네 음악원에서 졸업할 때가 되자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그리스 국립오페라단 비상근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줄을 대주었는데아직 10대의 나이에 오페라 무대에서 심각한 핸디캡이었던 고도근시까지 있었음에도 별 무리없이 무대 연기를 소화해냈다상근 단원 자격을 얻어 처음 맡은 주역은 1942년 8월에 공연된 푸치니의 토스카 타이틀 롤이었고이어 그리스에서는 초연이었던 오이겐 달베르의 '저지(낮은 땅)'에서도 여주인공 마르타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1944년 여름에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도 타이틀 롤로 열연했는데독일 비평가였던 프리드리히 헤어초크가 극찬했을 정도로 명연이었다고 한다하지만 이러한 추축국 측의 좋은 평가가 그리스 해방 후에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는데해방 직후 이어진 내전 상황 속에서 칼라스는 독일 협력자로 간주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이달고는 이탈리아로 옮겨가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는데칼라스는 오랫동안 못보았던 아버지도 다시 만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동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본 오디션은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긍정적인 평을 얻으며 피델리오와 나비부인 역을 제안 받지만, 칼라스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피델리오를 영어로 공연하는 것도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매로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것도 모두 탐탁치 않았다는 것. 이후 에디 바가로지가 기획한 투란토트 공연에 주역으로 캐스팅 되기도하지만, 시작도 하기전에 프로덕션이 도산하는 바람에... 하지만 바로 이 '투란도트' 준비 중에 베이스 바리톤 니콜라 로시-레메니를 만나고, 로시-레메니는 마침 뉴욕에서 그 시즌에 베로나의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에서 개최되는 유명한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 무대에 올릴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의 주연을 맡을 소프라노를 찾고 있던 조반니 제나텔로(왕년의 유명한 테너 가수로, 당시 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의 감독)에게 그녀를 조콘다 역으로 추천하였다. 오디션 결과에 만족한 제나텔로는 칼라스를 조콘다 역으로 캐스팅하였고, 그녀는 뉴욕에서 여객선을 타고 마침내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향했다.


재클린 전 남편인 아리스토엘 오나시스와 함께 한 마리아칼라스 

 

1947년 베로나에 도착한 칼라스는 '라 조콘다공연의 지휘를 맡은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계의 본좌였던 툴리오 세라핀을 만나게 되었는데이후 세라핀은 그녀의 멘토로서 그녀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47년 8월 2일 베로나 아레나 무대에 올려진 '라 조콘다공연에서 조콘다 역을 맡은 칼라스는 리허설 중 다친 다리에 깁스를 감고도 펼친 열연으로 성공적인 이탈리아 데뷔를 마친다이후 칼라스는 세라핀이 지휘하는 여러 오페라 공연에 출연하면서 경험과 명성을 동시에 얻기 시작했고, '라 조콘다공연을 계기로 만난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라는 사업가와 결혼했다참고로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1949년 1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역사상 전설로 남을 만한 진기한 공연을 했는데원래 극장과 맺은 계약은 1월 8/12/14/16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2부 '발퀴레공연에서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배역인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는 것이었다그런데 비로 뒤이어 라 페니체에서 상연될 예정이었던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배역인 엘비라 역으로 캐스팅된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지오가 인플루엔자로 앓아누워 하차하자두 공연에서 모두 지휘를 맡은 세라핀의 요청을 받아들여 1월 16일 '발퀴레공연을 마치고 19/22/23일 엘비라 역까지 노래했다완전히 다른 성격의 음악과 창법연기를 막힘없이 소화해내는 이 가수에게 청중들은 그야말로 뿅가죽네 상태가 되었다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때의 공연을 보고 경악했는데훗날 '그것은 마치 비르기트 닐손이 바그너 공연을 마치고 사흘 만에 베벌리 실즈의 대역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라고 회고했다이 일이 더욱 대단한 것은칼라스가 엘비라 역을 단 1주일 만에그것도 '발퀴레'를 계속 공연해가며 짬짬이 익혀 공연했다는 점이다다만 악보는 다 외웠어도 가사는 다 외우지 못해서무대 앞에서 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가 'Son vergin vezzosa'(나는 매혹적인 처녀)라고 읽어준 것을 잘못 알아듣고 그만 'Son vergin viziosa'(나는 사악한 처녀)라고 노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그러나 브륀힐데 역을 노래하고 사흘 만에 엘비라 역을 노래하는 '기적'을 마주한 관객들은 그런 실수쯤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재키의 남편인 오나시스와의 사랑은 허무함 그 자체였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경력을 봐도 상당히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고이후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특히 도니제티와 벨리니의 낭만주의 벨 칸토 위주로 확립되었다. 1950년 4월 12일 오페라 가수들의 이상향이자 가장 가혹한 비평 무대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아이다 역으로 데뷔하였는데이 공연은 당시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러나 곧 칼라스에 의해 밀려나게 되는레나타 테발디의 대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처음부터 주역으로 정식 계약한 라 스칼라 데뷔는 1951년 12월 7일 역시 베르디의 오페라인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의 엘레나 공주 역으로 이루어졌고곧 이 극장의 레귤러 가수가 되었다동시에 HMV(이후 EMI)의 명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도 발탁되었고본격적인 오페라 전곡 녹음도 시작했다.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연이어 거둔 성공은 다른 나라들의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는데, 1952년 11월 8일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극장에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여 절찬을 받았다이후 코벤트 가든에서 '아이다'의 타이틀 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역,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 '메데아'의 타이틀 롤, '토스카'의 타이틀 롤로 출연하였으며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도 1965년 7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공연이었다. 1956년 6월 12일에는 빈 국립 오페라극장에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로 데뷔하였다.

 

                                         위대한 음악가 마리아칼라스 

 

하지만 계속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자신의 뚱뚱한 몸에 대한 열폭 때문에 고민했는데결국 1953년 봄부터 다이어트에 들어갔다비록 남편인 메네기니나 그의 팬들은 칼라스의 몸집에 훨씬 관대했지만노래 뿐 아니라 연기하는 배역과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더 날씬한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행한 감량이었다. 1954년 초까지 약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칼라스가 뺀 살은 무려 36킬로그램이었고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북경오리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한몸매를 얻게 되었다.[5]

 

1954년에는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단에서 첫 미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쳐서, 1940년대에 아무 곳에서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미국 생활의 굴욕을 제대로 설욕했다그러나 이 오페라 공연 뒤 갑자기 사복경찰들이 대기실에 찾아왔는데미국 공연기획자인 에디 바가로지가 칼라스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소 소식을 듣고 칼라스가 완전히 꼭지가 돌아서 고성과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혔는데완전히 뒤틀린 표정의 칼라스와 오히려 그 기세에 눌려 두려워하는 사복경찰의 모습은 그야말로 짤방 감이 되었다이 사진은 이후에도 칼라스 스캔들 관련 기사에 종종 등장하며 '성질 더러운 프리마돈나'라는 이미지 형성에 한몫 했다.

 

칼라스:즈드르 금흐 느를 그스흐(저들이 감히 나를 고소해)

마리아 칼라스의 별장...가르다 호수

 

1956년에 역시 노르마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처음 출연했을 때도 스캔들이 일어났는데타임 지에서 칼라스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관계나 어머니와의 불화 등을 상당 부분 왜곡하고 부풀려 게재한 기사를 실은 것이 화근이었다이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지만칼라스에 대한 언론의 설레발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죽기 직전까지도 온갖 선정적인 기사와 그로 인한 소송드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추락하는 마리아 칼라스의 불륜과 불행 

 

하지만 칼라스도 신은 아니었고빡빡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목을 혹사하다 보니 예정했던 일정을 취소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했던 노르마 역은 그야말로 흑역사였는데공연 전날 나이트클럽에서의 신년 파티에서 너무 과음하고 신나게 놀았던 탓에 공연 직전에 목이 부어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 의사나 매니저가 출연 취소를 간청했음에도 '누구도 칼라스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억지로 무대에 올랐다가 제1막도 끝내지 못한 채 공연 취소를 선언하고 극장을 나가버렸다사실 극장측도 관객들이 칼라스의 노르마를 잔뜩 기대하고 있다며 대역조차 준비해 두지 않았고설령 대역을 쓰려 해도 감히 칼라스의 대역으로 노르마 역을 노래하려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그대로 공연을 강행했다가 사달이 났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공연이 이탈리아 대통령 등 정계 고위층들이 임석한 중요한 이벤트였던 터라공연을 망친 칼라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대단히 빠르게 확산되었다당시 제작된 뉴스 필름의 아나운서 멘트도 비꼬는 투가 다분했을 정도.[6] 물론 여기에 가만히 있을 칼라스도 아니었고곧 극장과 언론사를 향해 분노의 고소장들을 날려버렸다.

 

재클린케네디의 등장으로 선박왕 오나시스와 헤어진 마리아칼라스

 

사생활 쪽에서도 남편 메네기니가 자신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수입(공연 출연료레코딩 개런티 등)을 시동생들의 사업자금 등 시가(媤家식구들을 위해 무단으로 써버린 사실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특히 1957년에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만나 눈이 맞으면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칼라스와 오나시스가 비록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면서 조용하게 관계를 가지려고 했다지만, 1959년에 결국 칼라스가 오나시스의 아이를 임신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자 공개적으로 들통나고 말았다당연히 빡친 메네기니는 언론에 떠들어댔고칼라스는 불륜녀로 찍히고 말았다그러면서도 메네기니는 돈줄인 아내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혼만은 못해준다고 버텼고결국 칼라스는 지루한 공방 끝에 이탈리아가 아닌 그리스에서 이혼 절차를 진행시켜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했다.

 

그런데 오나시스는 '나의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는 욕정을 느낄 수 없다'는 이상한 핑계를 내세워 칼라스에게 낙태 수술을 강요했고결국 그녀는 뱃속의 아기를 낙태시키고 말았다칼라스와 오나시스 사이의 관계는 그 뒤로도 동거 형식으로 계속 이어졌지만그마저도 1968년에 오나시스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에게 관심을 돌리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외도와 그로 인해 빚어진 유산 후에는 다시 몸을 추스려 무대로 복귀했는데, 이미 목 상태도 예전같지 않아 거의 재활 훈련 급으로 강한 발성 연습을 거듭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가사의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고, 다루는 작품도 노르마와 토스카, 케루비니의 '메데아' 정도로 극히 적어졌다. 결국 1965년 7월에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를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를 영원히 떠났다.

 

마리아칼라스의 한국공연 사진 

 

이후에는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와 '공주 메데아'라는 영화를 찍기도 했고,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해 보기도 했지만 모두 평은 좋지 않았다. 1971년부터 72년까지는 뉴욕의 줄리어드 음대에서 성악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했고, 이 수업은 녹음되어 칼라스 사후에 음반과 녹취록으로 발매되었다.


1973년에는 자주 콤비를 이루어 공연했던 테너 가수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 순회 투어를 개최했는데, 물론 둘 다 성악가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고 평단의 여론도 매우 좋지 않았지만 원체 유명했던 이름값으로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투어의 마지막은 1974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공연으로 끝났다. 1976년에는 재차 컴백할 계획으로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비밀리에 리허설을 했는데, 이 장면이 파파라치들에게 잡혔고 곧장 칼라스의 목소리 상태에 대한 폄하의 기사가 (한마디로 발성이 엉망진창이었다는 조롱의 내용) 프랑스 언론들에 떴다

 

마지막 컴백 계획이 무산된 뒤에는 파리의 아파트에 틀어박혀 거의 고립된 생활을 했고우울증과 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처방전도 없이 온갖 약품들을 다량 복용하면서 건강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다이때 집에 틀어박혀서 젊은 시절 전성기 때의 음반을 듣고 홀로 흐뭇해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래...그땐 넌 참 잘했어."

 

그렇게 쓸쓸히 1977년 9월 16일 아침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유해는 그리스 정교 의식에 따라 진행된 장례 후 화장되어 페르 라셰즈 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하지만 유골함은 극성팬들에 의한 도난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결국 후견인이라고 자칭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인이 칼라스 생전의 유언이라며 유골을 에게해에 뿌렸다하지만 여기에도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었으니...

 

음악의 대중적 성향

 

그리스 시절에는 상술한 대로 달베르의 '저지'(Tiefland)와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한 기록도 있고, 이탈리아 경력 초반에는 하이든의 오페라나 오라토리오,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공연한 기록도 있지만, 일단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만을 중심 레퍼토리로 삼았다. 다만 리사이틀이나 녹음에서는 베토벤, 모차르트, 베버, 바그너 등 독일어권 작곡가와 불어권 아리아들도 종종 불렀다.

마리아칼라스 홀

 

음악사적으로 칼라스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로시니빈첸초 벨리니도니체티로 대표되는 이른바 벨칸토(bel canto. 탐미주의오페라 레퍼토리를 20세기에 부활 시킨 일이 될 것이다칼라스의 데뷔 당시 오페라의 대세는 푸치니를 위시한 베리스모(verismo. 사실주의오페라였다벨칸토 오페라 중 노르마나 루치아 같은 대작들은 여전히 공연이 되었지만주로 가수들의 기교 과시용 작품 취급을 받던 상태칼라스는 안정된 고전적 벨칸토 창법과 타고난 음악성을 발휘구닥다리로 전락한 벨칸토 오페라의 음악적/극적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칼라스의 벨칸토 오페라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자신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토스카마저 '그냥 일이니까 부르는 것'이라고 폄하했을 정도다.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로 한정되어 있지만역할의 성격과 목소리 특성면에서는 칼라스만큼 폭넓은 영역을 선보인 가수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스타일적으론 케루비니나 스폰티니의 고전주의 오페라부터 푸치니의 베리스모까지성악적으로는 콜로라투라 기교가 넘치는 루치아부터 바그너의 브륀힐데와 쿤드리까지극적인 면에서는 연약한 소녀 나비부인부터 사자처럼 포효하는 메데아까지 넘나든 것이다. [11] 57년에 한 인터뷰에서칼라스는 호기당당하게 "제 라이벌들이요비슷비슷한 작품만 연달아 부르는 가수들을 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나요?"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넓은 영역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음악적 자질과 집착에 가까운 완벽주의그리고 일 중독 수준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다그리스 시절 문단에 쓴 바와 같이칼라스는 그리스에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배우던 시기부터 자신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진 수업 뿐 아니라 음악원 커리큘럼의 가능한 모든 과목을 청강해 가며 성악 뿐 아니라 음악 전반에 걸친 지식을 모두 습득하려고 했다흔히 칼라스를 연기력이 빼어난 가수라 칭하지만그녀는 철저히 음악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이해했지 음악적 이해의 부족을 연기로 메꾸는 가수가 아니었다.

 

칼라스는 각각 다른 음악적 성격과 작곡가별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인 가수였다. 1959년에 런던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녹음할 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미숙한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관악 단원들에게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스타일적 차이점각종 장식음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가며 녹음을 했을 정도였다요즘에는 성악가들도 다양한 음악 이론을 배우지만칼라스의 시대에는 성악가는 노래만 잘 하면 된다는 분위기였다(무식하고 콧대만 높은 '디바'의 이미지는 그때문에 생겨났다).

 

또 오페라에서 비음악적 표현을 동원하는 것을 싫어하던 그녀의 성향은 생애 후반이었던 1970년대에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개최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잘 드러난다젊은 성악가들에게 칼라스는 끊임없이 텍스트의 이해정확한 기교몸에 앞서 목소리로 연기할 것을 강조하고악보에서 벗어난 장식음이나 한숨웃음 같은 비음악적 표현을 집어넣으면 가차없이 제지하고 있다.

 

칼라스는 이런 엄격한 잣대를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동료 가수나 극장 매니저 측에도 똑같이 요구했고이는 종종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칼라스를 '해고'한 것으로 유명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극장장 루돌프 빙은 훗날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내가 만난 가수 중 가장 지적이었다그녀는 완벽한 공연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다른 가수들처럼 적당히 설득하고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극장장으로서 그런 그녀와 일하기란 무척 어려웠다."라고 회고했다. 1950년대 초반에 칼라스와 함께 녹음과 공연을 했던 카라얀도 "리허설 첫 날부터 칼라스가 악보를 들여다 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자기 역할 뿐 아니라 오페라 전체를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고그건 지휘자에게는 큰 위협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런 위대한 성악가의 목소리가 일반적인 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기묘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자신의 녹음을 처음 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내 못난 목소리에 너무 충격을 받아 눈이 빠지게 울었다"고 말했을 정도일반적으로 소프라노라면 연상되는 맑고 청량한 느낌대신칼라스는 음성은 기본적으로 무겁고 회색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을 준다그러나 칼라스는 적어도 전성기 때는 그런 타고난 음색을 빼어난 호흡 조절과 성악 기교로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그래서 노르마에서 표효하던 그 목소리로 몽유병의 여인에서 고음의 기교를 무리 없이 오르내리고 나비부인에서는 놀랄 만큼 순박한 소녀의 음성을 보여줄 수 있던 것그래서 어떤 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면 그런 폭 넓은 표현력을 위해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목소리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지난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고음이 거칠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60년대에 드러서면서는 총체적인 변질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목소리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결론이 없지만급격한 다이어트무리한 일정다난한 개인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이 함께 작용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 전설적인 연기력을 눈으로 확인할 영상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큰 아쉬움이지만이미 목소리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에 촬영된 열악한 화질의 영상만으로도 칼라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오페라 연기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62년 함부르크 리사이틀에서 카르멘을 부르는 영상, 65년 파리에서 노르마를 리허설하는 짧은 영상을 보면 호들갑스런 동작 없이 목소리와 혼연일체된 절도 있는 손 제스처와 시선 처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그래서 칼라스와 여러 번 함께 작업한 지휘자 안토니노 보토(1896~1985)는 "칼라스를 단순히 가수로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무대 위 그녀는 음악가이며 배우이며 무용수이며 음유시인이다한 마디로 칼라스는 완벽한 공연 예술가다"라고 말했다.

 

마리아칼라스 사후의 평가와 우여곡절

 

생전에 실황으로 공연을 본 사람들의 인상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EMI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꽤 많은 양의 오페라 전곡 음반과 아리아집을 남긴 탓에 녹음으로나마 그 전설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곳곳에서 득시글대고 있다저작권이나 저작인접권 만료 직전까지도 EMI가 이들의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리마스터링을 몇 차례고 거쳐 각종 전집 시리즈를 내놓아댔을 정도.

 

게다가 다른 가수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리허설 음반이나 마스터 클래스 음반심지어 인터뷰 음반까지도 유통되고 있어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그 외에 방송국에서 중계한 실황녹음 같은 비공식 음원이나 객석에서 몰래 녹음한 부틀렉도 이런저런 복각 전문 음반사에서 계속 출시되고 있다.(물론 개중에는 해적반도 많다.)

 

사후에도 이런저런 전기 영화나 연극이 나오고 있는데평전 등 전기물 종류도 꽤 많은 편이다다만 칼라스가 원체 굴곡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인 만큼이들 저작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꽤 다양하게 갈라진다가령 토니 파머의 전기 영화는 영화 자체로만 따지면 꽤 잘 만든 다큐멘터리 축에 들지만칼라스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 정도로 왜곡이나 비약이 심하다는 욕 또한 많이 먹는다.

 

한편 씁쓸함을 남기는 반전도 있었는데칼라스 사후 그녀의 유언 집행인을 자처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자가 사실은 막대한 유산을 노린 고도의 사기꾼에 칼라스를 죽음으로 몬 각종 비처방 약들의 제공자라는 내막이 폭로되었다여러 전기 작가들과 생전 지인들은 데비치가 칼라스와 친분 관계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지는 않았고매니지먼트나 유언 집행인 자격도 인정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프랑코 제피렐리는 2004년 말에 기자회견까지 열어 데비치의 행적을 맹렬히 비난했고억대의 소송에 봉착한 데비치가 죽기 직전 자기 몫의 유산을 마리아 칼라스 기념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하며 일단락되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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