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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과거’ 증오 품은 두 남녀… 복수를 위해 ‘핏빛 칼춤’을 추다
  • 편집국
  • 등록 2023-01-04 08: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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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 선임기자]

학폭 피해자였던 교사 문동은 가해자 딸 담임선생으로 부임“사과하지마… 넌 벌 받아야지”

빼어난 외모 · 실력 갖춘 의사 그녀의 상처에서 자신을 보듯
“할게요… 망나니 칼춤 출게요”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매일 학창시절을 곱씹으며 산다. 여고시절이다. ‘어느 날 여고시절∼ 변치 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 이수미가 부른 ‘여고시절’ 속 학창시절은 낭만이다. 하지만 그 여자의 기억 속 학창시절은 달리 적힌다.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어. 어떤 증오는 그리움을 닮아서 멈출 수가 없거든.” 그를 학창시절로 되돌려놓는 감정의 정체는 분노와 증오다. 이런 그 여자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다. 호감일까? 호기심일까? 웃음 한번 짓지 않는 그 여자가 궁금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쉬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 여자가 짊어진 짐이 가볍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그 짐의 무게를 알게 된 순간,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위해 기꺼이 칼춤을 추겠다며 말한다. “할게요, 망나니.”


◇가난이 죄가 된, 그 여자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은 끔찍한 학교폭력(학폭)의 피해자다. 무슨 잘못을 해서 모진 일을 당해야 했을까? 가난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에는 괴롭힘의 이유가 된다. 그 여자에게는 가난이 죄가 돼 혹독한 벌을 받았다.


혹자는 묻는다.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고. 문동은은 “도와달라” 외쳤다. 하지만 담임 교사는 든든한 부모를 등에 업은 가해자들을 두둔했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그런 선생에게 다시금 모든 것을 맡겼다. 가난한 문동은의 엄마는 가해자의 부모가 준 돈을 받고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돈의 논리 앞에 누구 하나 그 여자를 감싸지 않았다.


문동은은 바둑을 배웠다. 그 여자에게 바둑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여유 따윈 없었다. 그 여자는 “목적이 분명했고, 상대가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니, 아름답더라”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 학폭에 의해 철저히 망가진 그 여자는 성인이 되어 가해자의 정성이 깃든 집을 빼앗기 위한 또 다른 게임을 시작한다. 마치 바둑을 두듯.


기댈 곳 없는 가난한 한 여인이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을 상대할 힘을 기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문동은은, 그리고 문동은을 창조한 작가는 영리했다. 그에게 교사라는 직업을 부여했다. 그리고 가해자 딸의 담임이 된다. 부임 첫날 그 여자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앞으로 이 교실에서 다음 세 가지는 아무 힘도 없을 거야. 부모의 직업, 부모의 재력, 부모의 인맥.”


자식을 맡긴 부모는 약자다. 그런 부모조차 곁에 없었던 문동은을 철저히 짓밟던 가해자 역시 자세를 낮춘다. 딸의 담임이 된 그 여자 앞에서 여전히 센 척하지만 “원하는 만큼 돈을 주겠다”며 물러나 주길 원한다. 하지만 그 여자의 목적은 돈이 아니다. 돈은 쓰면 없어지지만, 그의 온몸에 남아 있는 학폭의 흔적은 영원하다. 그래서 그 여자는 사과를 거부한다. “사과하지 마. 사과받자고 10대도, 20대도, 30대도 다 걸었을까? 넌 벌 받아야지. 신이 널 도우면 형벌, 신이 날 도우면 천벌.”


 ‘더 글로리’의 주여정은 뻔한 백마 탄 왕자 서사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백마 탄 왕자가 아닌, 그 남자


‘더 글로리’의 집필자는 ‘도깨비’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등으로 유명한 김은숙 작가다. 김 작가가 창조한 일련의 작품 속 남자 주인공은 백마 탄 왕자의 현신이다. 전지전능한 도깨비이거나, 현대 사회의 전지전능한 유일한 물질인 돈을 잔뜩 쥔 재벌이다. 그들은 각각 죽을 운명을 가진 고아, 가난한 스턴트우먼이나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명문 학교에 입학한 여고생의 우산이 돼준다.


하지만 ‘더 글로리’의 주여정(이도현 분)은 전형적인 백마 탄 왕자와 결이 다르다. 빼어난 외모에 실력 있는 성형외과 의사지만 그 남자 역시 상처 입은 존재다. 연쇄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은 후 증오심을 품고 살아간다. 응급실에서 우연히 영양실조 상태인 그 여자를 보고 연민 섞인 호감을 느낀 것은 짙은 그늘에 깔린 그 여자의 얼굴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둑을 잘 두는 그 남자는 “바둑을 잘 두고 싶지만, 이세돌은 모른다”는 그 여자가 더 궁금해진다. 분명 그 여자가 바둑을 두는 목적은 따로 있다. 가해자 남편의 취미가 바둑이고, 그 남편과 가까워지기 위해 바둑을 두는 그 여자의 속내를 그 남자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그 남자는 꼬치꼬치 묻지 않는다. 그 여자의 과거를 존중하고, 기꺼이 동참한다.


한 발 더 가까워지려는 그 남자를 향해 그 여자는 선을 긋는다.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다”는 그 여자는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학폭의 기억을 드러낸다. 그 분노에 공감한 그 남자는, 사람을 살리는 메스를 들던 손으로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칼을 들기로 결심한다.


◇왜 ‘더 글로리’(영광)일까?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의 핏빛 복수극이다. 고2가 되는 딸을 둔 학부모인 김은숙 작가에게 학폭은 가장 가까운 화두였다. 작품을 준비하며 피해자들의 글을 읽은 김 작가는 피해자들이 ‘현실적 보상’보다는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실적 보상이란 물론 돈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돈을 다루는 가해자들의 단상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여럿 있다. 기상캐스터지만 원고 한 줄 못 쓰는 가해자는 원고를 작성하는 작가를 쓰며 “푼돈으로 방금 내가 쟤 하늘이 됐어”라고 이죽거린다. 네 명의 가해자 사이에도 위계질서는 존재한다. 돈을 가진 자는 위에 군림하며 “놀아주니깐 아직도 친구인 줄 알지?” “우리 이제 고딩 아니야, 우정만으로 우정이 되니?”라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이긴다. 특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제일 쉬운 문제라니깐”이라는 그들의 대화는 현실적 보상 따위로 세상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이들의 추악함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김 작가는 “세속에 찌든 저로서는 진심 어린 사과로 얻어지는 게 뭘까 고민했고, 얻는 게 아니라 되찾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면서 “폭력은 인간의 존엄, 명예, 영광을 잃게 한다. 사과를 받아야 비로소 원점이고 거기서 시작이구나 해서 ‘더 글로리’로 제목을 지었다. 피해자들의 원점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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