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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와 영화배우 강수연의 흔적들을 추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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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2-05-09 05: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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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를 슬프게 한 것들보다,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조대형대기자  


인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곳, 즉 공간은 문화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한 명의 노쇠힌 시인 김지하와 또 다른 한 명의 영화배우 강수연이 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 정치사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독재저항의 상징주의 시인 김지하는 반항과 방황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인간 김지하의 우정과 사랑의 기억들,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의 파편들, 후회되지만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과거,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난 김지하. 그리하여 다시 볼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속절없는 그리움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게 문학작품을 핑계로 실컷 울어야만 비로소 가라앉기 시작하는 김자하의 슬픈 얼굴을 본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아침과 눈부신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일지라도, 김지하의 상징적 시간은 이제 영원한 밤이다. 그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끝에 이날 오후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폭력에 온몸으로 부딪친 투사이자 전통 사상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선구적 생명사상을 설파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가 7년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자신을 탄압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변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본명이 김영일인 고인은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1954년 강원도 원주로 이주해 원주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의 중동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 1964년 대일굴욕외교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서울 문리대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를 쓰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4개월 간 투옥된다. 1966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69년 조태일이 주재하던 시 전문지 <시인>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서울길’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공식 등단했다. 등단 이듬해인 1970년 5월호 <사상계>에 권력형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에 얹어 통렬히 비판한 담시 ‘오적’(五賊)을 발표하고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이 작품을 전재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 시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한 것이라며 반공법 위반으로 김지하를 잡아 가두고 <사상계> 발행인과 편집인, <민주전선> 편집인 등 역시 구속했다. 이 사건이 국회에서 문제가 되자 그는 옥살이 한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은 일약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일찍이 고교 시절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공식 등단 전인 1963년 <목포문학>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던 김지하는 등단 이듬해인 1970년 말에 선연한 핏빛 서정으로 아우성치는 첫 시집 <황토>를 출간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고 그와 관련해 수배되었던 그는 그해 4월에 체포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로부터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사형 구형 당시부터 일본을 중심으로 김지하를 구명하기 위한 활동이 펼쳐지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노엄 촘스키 같은 지식인들이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하는 등 국제적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1975년 2월15일,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약 10개월 만에 출옥한다. “종신형을 받았는데 벌써 나오다니 세월이 미쳤든지 내가 미쳤든지, 아니면 둘 다 미쳤든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김지하의 출옥 소감이었다.

출옥한 지 불과 열흘 뒤인 2월25~27일 3회에 걸쳐 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 ‘고행―1974’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자 당국은 다시 그를 체포했고 기왕의 무기징역에 더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다. 그로부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인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기까지 그는 70년대의 남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이때 생명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가 옥 안에 있는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1982년 <황토>에 이은 두 번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와 <대설 남> 제1권이 출간되었지만 곧 판매금지되었다. <대설 남>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생명사상은 이후 이야기 모음 <밥>과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 등으로 이어졌다. 1986년에는 생명사상과 민족 서정을 결합한 시집 <애린> 첫째권과 둘째권을 잇따라 내놓았고, 1988년에는 수운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다룬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을 펴냈다. 1990년대 이후에도 시집과 산문집을 부지런히 펴냈는데, 시집 <중심의 괴로움>(1994)과 <화개>(2002), 문학적 회고록 <흰 그늘의 길>(전3권, 2003) 등이 대표적이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의 곤봉에 맞아 죽은 뒤 그에 항의해 학생·청년들의 분신과 투신 자살이 이어지자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장문의 칼럼을 실어 투쟁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일로 그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민주화 운동 진영과 척을 지게 되었고, 그의 구명 운동이 계기가 되어 결성되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작가회의)에서도 제명되는 곡절을 겪는다. 그 이후 율려와 후천개벽 같은 민족사상을 설파하는 산문집을 꾸준히 내던 그는 2001년에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에 나서고 작가회의의 후배 문인들과 화해의 자리도 마련하는 등 회복을 위한 노력도 보였으나,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는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도 민주화 운동권을 싸잡아서 매도하고 문학 및 민주화 투쟁 동료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막말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음으로써 자신의 ‘변절’을 완성하다시피 하게 된다. 독재자 박정희의 철권 통치에 맨몸으로 맞서면서 1960~70년대를 박정희와 김지하의 이인 대결 시대로 만들었던 투사 시인 김지하. 그러나 독재자의 무능하고 부패한 딸에 대한 옹호와 지지로 어처구니없이 훼손된 말년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그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영화사를 빛낸 레전드 여배우들의 ‘영화 같은 삶’, ‘삶 같은 영화’의 주인공 강수연 또한 우리들의 곁을 떠났다. 남성들은 영화를 통해서 여배우와의 로맨스를 꿈꾼다면, 여성관객들은 바로 그 여배우를 꿈꾼다.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예술이 될 수 있었던 건 ‘여배우’라는 매력적인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수연이하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렀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한결같이 ‘영화 같은 삶’을 살았고, 또 그것을 작품에 투영해 ‘삶 같은 영화’를 찍었다. 그들이 영화사에 빛나는 필모그래피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나는 영화배우 강수연을 만나본 적이 있다. 어쩌면, 어떤 종류의 질서 안에서는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으로. 그녀가 나를 불렀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녀를 불렀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언젠가, 그녀의 연기에 대한 아주 짧은 리뷰를 통해 만났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 그 원고에 대해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가 강수연이 사용했던 아주 이상한 쉼표 하나를 매우 불안해하며 언급했었다는 사실이다.

 

강수연의 귀여움, 고상함, 섹시함… 이런 모든 요소를 갖춘 여배우는 가능할까. 

은막의 스타 강수연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여배우이다. 조금만 떠도 배은망덕했던 여배우들과 달리 그녀는 늘 "스크린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강수연의 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각각의 시대성 속에서 살아낸 많지 않은 경우에 속한다. 두 시대성 사이의 단절과 흐름, 이접(離接)이 그의 영상언어에 안팎으로 새겨져 있다.

그 연결고리는 ‘상실감의 내면화’다. 강수연은 상실감 혹은 상처의 근원을 자기 속에서 대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미적 거리’를 확보한다.

모든 영화는 인간의 이야기다.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이 완전히 다르게 구성해내는 이야기가 뜻밖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강수연을 추도하는 슬픔이 여기에 있다.’

 

이제 두 사람, 종이 위에 수 많은 애절함을 그려낸 시인 김지하와, 은막의 스타 강수연은 다시는 이승에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보다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거나 환희에 차게 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슬프게는 하지 않는 것. 보통 사람들의 가만한 일상, 때때로 실수는 하지만 곧바로 후회하고 반성하며 부끄러워하는 삶, 우리의 미래,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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