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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를, 누가 나를 사랑하게 하는 것들의 이중주
  • 편집국
  • 등록 2023-01-08 01: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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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형대기자]


기독교, 어느 한때 내가 사랑하여 버린 것들이지만, 그것으로 하여 내가 빈궁하거나, 또는 고혹하지는 않았던 것들이, 어느 누구로 하여 다시금 경청하게 된 기독교에 대한 적라함들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로 부활되어 묘하게도 마음에 끌린다. 

 

과거 어느 때 나에게 있어서 성경은 교과서와도 같은 것이어서 나도 분명 거기에 담겨진 것들을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 기억에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것은 왜이며, 그럼에도 내용은 전혀 생각 나지 않는다. 단지 무엇이 나를 유리하게 만들었는지, 지금 나에게는 무엇이 슬픈지에 생각이 미칠 뿐이다. 

 

내가 다니던 그 교회 어느 한켠에선가 울고있었던 아이들의 모습, 아마도 그 아이는 고아가 아니었나 싶은게 희미한 기억속에 지워지지 않은채 기억되어지고, 그 교회라는게 슬프디 슬픈 것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도 어른 거리고, 남보다는 헌금을 많이 거만한 인간,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았던 여선생과의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오늘 어느 한 시간에 주어진 캄캄한 밤, 모처럼 나는 하늘 얘길 들었다. 잊고 살아 망각되어진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즐겨보았던 성서들을 보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지만 까드막하기만 하고, 이제까지 직접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마음속에서만 생각했던 그런 성서의 얘기들을 누군가에 의해 들어 봤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무엇이 그리 바빠서 그 희대의 성전을 보지 못했는지.

 

먼 옛날, 교회를 가기 위해 한밤중에 탓 던 버스 창밖에서 손을 흔들던 소녀가 떠 오르고, 

교회 인근 야산에서 찬송을 하던 소녀를 바라보며 할 일없이 들꽃을 꺾던 나의 소년 시절도 떠오른다. 이 모든 생각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에 슬프고, 아직까지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남아있기에 슬프다.

 

내가 과거의 기독교에 천좍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여자 때문 일 게다. 

분명 내가 그 여자에게 들었던 것은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 일부였겠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생각들을 한 것은 분명하다. 나의 추억과 향수와 방황, 그리고 사랑을 읽는 데는 무리가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나의 기억속에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영속하지 않는다. 보통의 한숨처럼 짧은, 찰나의 추억만을 남기고 기억의 그림자 뒤편으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젊음도, 꽃도, 그리고 사랑도 그러하다.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긴 회한과 마르지 않는 눈물, 그리고 긴긴 불면의 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시간을 보내면서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나를 슬프게 했던 기독교의 흠집 마저도..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는 여자의 화법과 위치, 얘기는 시종일관 그 거리와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기독교에 대한 천좍을 전달한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생생한 기억으로 풀어낸다. 

자신의 어머니가 하나님을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 그의 외할머니 또한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을 듯 싶고, 기록도 부재한 것을 나에게 어떻게든 설명한 것들이 기억될 수 있고 기록될 수 있을까? 혹은 기록 되어야 할까? 

 

그 여자는 자신에 내재된 기독교 역사의 기억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나에게 가만히 묻는다. “하나님을 믿는 신도로 귀의할 수 있느냐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내가, 기독교를 추앙하는 여자를 만났다. 우리는 분명 너무도 다른데 왜였을까? 나는 그 순간 그 여자가 나 같았다. 처음으로 그 여자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토론이나 분석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비난하고 헐뜯을 대상도, 저항하거나 두려워할 대상도 아니다.” 온화한 무관심은 “살짝 긍정적인 편”이지만, 종교에 대해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철저한 무관심은 종교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 즉 삶의 의미나 죽음 등에 대해 애초부터 무관심하다.

 

나는 사실 루터교의 오랜, 그래서 “게으른 독점”이 종교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렸다는 가설을 내세우곤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진 오늘............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가슴과 가슴을 맞대었다. 나는 지금 막 내 삶의 은총을 읊조린 그 여자의 입술을 닫았다. 시간은 우리를 위해 정지해 있었고, 우리 주변의 세계도 사라졌다. 그때 하나의 깊은 한숨이 그녀의 가슴으로부터 새어나왔다. "하느님, 나에게 이 축복을 용납해 주소서"라고 그녀는 중얼거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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