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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 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136년 전 오늘 1884년 12월4일의 갑신정변
  • 편집국
  • 등록 2020-12-03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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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 3일의 권력이 왜 무산됐는가?

갑신정변의 주역들

갑신정변(甲申政變) 또는 갑신혁명(甲申革命)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이다. 진압 후, 갑신난 또는 갑신전란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이를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이라 불렀다.


12월 4일 저녁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고종 민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고 12월 6일 오후,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의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 개화파가 당시에 내놓은 정책 중 현재 전하는 기록은 14개 조항이나, 일설에는 80개 조항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2월 4일 민씨 정권은 이미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청 군대를 불러들였고, 민비는 창덕궁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김옥균이 일본에 의존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해 12월 말 조선 조정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 등을 특차전권대사로 파견,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측의 개입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한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갑신의거, 갑신사태, 갑신봉기 등으로 부른다. 그밖에 '3일 천하', '3일 혁명' 등으로도 부른다.


1874년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1] 이때 조선군의 선제 발포가 문제가 되어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이후 위정척사파들의 시위는 격화됐고, 1877년 흥선대원군의 쇄국을 반대하고 강화도 조약을 지지하였던 박규수가 별세,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1884년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그해 7월부터 계획을 세워 그해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실각된 흥선대원군 이하응

김옥균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겼다. 민씨 정권 측은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이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넓은 곳을 지키기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12월 6일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시 위안 스카이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투입해 들어옴으로서 3일 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현재 전하는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한다,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한다, 조정 대신들은 직접 회의를 개최하고 안건을 결정한다, 순사를 설치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김옥균의 《갑신일록》에는 그 중 일부인 14개 조항의 내용만이 현재 전한다.


정변 배경, 쇄국정책에 대한 반작용


대원군 시절부터 북학파 박규수와 유대치, 오경석 등은 우리도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고, 이들은 개화파를 형성했다.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인인 김홍집, 김윤식 등은 이들의 개화 사상을 정책적으로 반영하려고 시도하였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사실상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 정책과는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 여론과, 밖으로는 운요 호 사건 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1] 신미양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1874년 11월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1]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이때 박규수, 오경석,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은 고종에게 일본측이 부당한 요구를 하는가 알아보고 발포를 가해도 늦지 않다는 견해를 계속 피력하였고, 조정의 원로 대신들은 이들이 매국노라면서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책 하나만큼은 잘 하는 일이라고 맞받아쳤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인천항의 전신인 제물포

지방의 유생들, 주자와 송자의 법통 계승을 자처한 화서 이항로 학파 사람들은 박규수, 오경석, 김홍집, 김윤식 등이 매국노들이라며 이들을 극형에 처하고, 오랑캐를 물리칠 것을 수시로 상소하였다. 또한 이 기회에 노론 정권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영남 남인들 역시 박규수, 오경석,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을 규탄하는 상소를 연일 올려댔다.


제물포 조약 전후


 1882년(고종 19)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씨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보수 세력으로 되었으니,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민영익·민승호 등과 정계의 요인(要人)이었던 김홍집·김만식(金晩植)·어윤중 등이 이에 속하였으며, 이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씨 일파의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일본 제국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독립당 또는 개화당이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윤웅렬 등의 소장파들이었다.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한 제물포 조약에 따라 사과 사절 등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박영효 일행은 친일 성향을 가지고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고, 이들 개화파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집권파 세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이 대립은 당시 청나라의 알선으로 내아문(內衙門)의 고문으로 있던 묄렌도르프의 의견에 따라 사대당이 당오전(當五錢)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악성(惡性)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경제계를 혼란시킨 데서 더욱 격화되었다.


개화파의 탄생


갑신정변 주도한 개화파 3인방 서재필·김옥균·박영효

노론 북학파의 학통과 정치사상을 계승한 이들은 문호개방을 전후하여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이 보다 적극화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의 문인들을 길러냈고, 1870년대 개항기에 와서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서재창, 서재필, 유길준, 윤웅렬, 윤치호 등 젊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80년대 이후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며 개항론을 주장하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뒷받침했다.


일본과 수교 이후 고종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는 개항 정책을 실시하였다.[2] 북학파였던 박규수, 오경석 등은 청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서양을 야만인 취급하지 말고 기계와 태엽 시계, 각종 태엽 기계 등의 제조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개화 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형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일본에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게 했다.[2]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수구를 주장하던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했다.


대원군 정권을 전복하는데 앞장섰던 최익현, 김평묵 등 화서학파를 필두로, 서원 철폐로 대원군을 증오하던 유림 세력, 노론 자체를 부정하던 영남 남인들은 개화파가 나라를 망치려 든다며 한목소리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안기영 등의 대원군 주변 세력은 고종을 몰아내고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국왕 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의 고변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었고,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시대적 배경


갑신정변의 정략장소였던 우정총국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청나라를 통해 서구 문물이 유입되었고, 일부 중인층 지식인과 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권리를 요구하는 등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하층민들 역시 자신들도 인간임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사회적 변화 외에도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단순히 문을 걸어 잠그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각지에서 터져나왔고 사대부와 지식인층은 조선 정부에 대안을 요구하였다.


노론 내 비주류인 북학파와 소론 양명학파 외에도 일부 관료와 중인 출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신분제도의 비합리성을 인식하고 외국 문물의 개방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려는 개화 사상이 형성되었다. 개화파의 일부 구성원들은 북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후신이기도 했지만, 개화 사상에 따라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내외정치의 개혁을 주장하며 결집, 형성된 정치 세력이기도 했다.


개화파의 사상적 배경


문명개화를 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리라는 개화사상의 선구자는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유대치)들이다. 북벌론을 공리공담으로 간주하고 북벌 대신 북학을 수용해야 된다던 박지원과 그의 문도들인 박제가, 홍대용, 김정희 등은 노론 내에서도 북학파를 구성했다. 그 후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에 이르러서는 청나라의 학문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을 직접 받아들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야만인이라고 한들 좋은 점이 있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사진은 능지처참후 김옥균의 목이 ‘대역부도옥균’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현장에 걸려 있는 장면.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셔먼 호를 불태워버린 장본인이며, 1862년 진주민란 때 안핵사로 내려갔던 인물이다. 그는 1872년 청나라에 다녀온 후 국제정세에 관심을 갖고,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사랑방에는 박영효, 김옥균, 김윤식, 유길준 등이 드나들었다.


오경석은 역관으로 청나라를 자주 오가면서 새로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실학자이기도한 김정희의 제자로 금석학에도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오경석은 친구 유홍기에게 자신이 접한 새로운 사상을 전한다. 그의 스승 김정희 역시 연암 박지원의 문하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홍기는 한의원으로 일명 산림정승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그는 비록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학식, 인격이 고매 탁월하고 교양이 심원한 인물[4]'이었다 한다. 유대치는 관직은 나가지 않았어도 사대부의 신분이었는데, 그는 거침없이 오경석을 비롯한 중인 계층과도 허교를 하던 인물이었다. 오경석, 유홍기 두 사람은 조선을 혁신하려면 양반 자제들을 개화 사상으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홍영식, 김윤식 등 세도가 집안의 유망한 청년들을 길렀다. 이 청년들은 신사유람단, 영선사의 일원으로 일본과 청국을 돌아보기도 하면서 개화정책의 핵심세력으로 자라났다.


개화파의 세력 확산


김옥균은 1880년 무렵부터 정치 결사조직인 충의계(忠義契)를 만들어 신복모(申福模)로 하여금 사실상 운영하게 하였다. 충의계의 회원은 서재필, 서광범 등이었다. 충의계는 43명으로 시작하였지만 1884년 경에는 회원수가 약 1,000명에 이르게 됐다.


한편 1883년 3월 박영효가 한성부 판윤에서 광주부유수로 전임되자, 박영효는 경기도 광주 임지에서 서실을 열고 퇴청 후에는 문하생을 가르치는 한편 광주부내에서 젊은이들을 끌어모아 약 500명의 청년들이 모이자, 본격적으로 군사 훈련을 시작하여 일종의 사병을 양성하였다.


갑신정변의 주역 서재필박사

이후 1883년 김옥균 등은 신식 군사 훈련 목적으로 서재필과 서재창 등 14명의 사관 생도들을 일본으로 유학보냈다. 이들은 일본의 신문물을 접한 뒤 토야마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단기 군사훈련 교육을 받은 뒤 1884년 7월 귀국했는데, 조선에 남아있던 개화파의 건의로 신식 군대 결성 여론이 조성되고 서재필이 바로 신식 군대 결성을 건의하자 고종은 바로 조련국 설치를 허가하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았다. 서재필은 바로 부임하지 않았다가 며칠 뒤에 조련국 사관장에 취임하여 병력을 양성하였다.


그 밖에도 온건 개화파이자 박규수, 유대치의 문하에서 먼저 수학한 선배 문하생이기도 한 윤웅렬이 있었다. 윤웅렬은 1883년 1월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부임했고, 윤웅렬은 남병사로 있으면서 야인들을 퇴치할 목적으로, 평소대로 북청군과 함흥부 등 함경남도 지역의 장정 약 500명을 모집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는데, 신식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윤웅렬은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다가, 일부만 자신이 직접 인솔해 내려오고 나머지는 함경남도병영으로 되돌려보냈다.


명성황후와 개화파의 갈등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흥선대원군을 납치, 텐진의 바오딩부에 유배케 했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을 일으켜 왕비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녀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며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써 위기를 넘겼다.[5] 그러나 조선내 청나라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고 조선의 자주독립국론을 주장하던 개화파의 불만은 높아져갔다.


비운의 왕 고종, 독살 의혹을 남긴 채 운명 후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왕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개화파 내부의 갈등


제물포 조약 이후 위정척사파의 강한 반발과 척신 세력의 부패가 극에 달하게 되자 개화파는 이 문제를 놓고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임오군란 후 이들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라졌다. 온건파는 청을 서양세력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이라고 하였다.[4]

개화파는 대부분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하생들이며 이동인과도 친분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 어윤중, 박정양, 김윤식 등의 온건 개화파는 일단 부국강병을 위해 문호를 개방하고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위정척사파를 상대하기 위해서 민씨 정권과 정치적 타협을 계속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힘을 키운 뒤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우선이며, 친인척을 등용하여 임오군란과 각종 민란을 유발한 민씨 정권 역시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수구파, 척신 처리 방법과 청나라에 대한 사대교린을 언제 끝내느냐를 놓고 차이점을 보였다. 온건, 급진 개화파에게 일치하는 점은 위정척사파 축출이었다.


온건파는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본따 점진적인 개화를 주장했다. 반면 급진파는 청과 그에 빌붙은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따 급속한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청나라에 대한 비판보다도 민씨 척신세력과 위정척사파까지 모조리 제거해야 된 급진 개화파의 주장에 대해 온건 개화파는 머뭇거렸고, 급기야 개화파 내에서도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급진파는 스스로를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 부르고, 온건파를 위정척사파, 민씨 세력과 싸잡아서 수구당, 사대당이라고 부르며 공격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고영희, 서광범, 서재창, 박영교 등은 급진파, 김홍집, 김윤식, 박정양, 어윤중, 신기선, 이조연, 이시영, 이상재, 김종한, 민영익 등은 온건파에 속한다. 이 중 민영익은 민씨 척신 세력과도 연결되는 인물이었다.


무력 정변 기도


급진 개화파는 점차 요직에서 소외되어갔다. 재정난 타개책으로 일본에서 300만 엔의 차관을 들여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6] 급진파는 온건파가 척신 세력이나 위정척사파와 타협한 것으로 보고 불신하게 된다.


이같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884년 봄부터 개화파는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청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철수시키고 있었다.[6] 강경 개화파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개화파는 조정의 신진 관료들을 포섭하기 위해 1880년 초에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하생들이 만든 충의계(忠義契)를 통하여 새로운 동지와 협력자들을 더 규합하였다.


일본은 청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공사 다케조에를 통해 쿠데타 지원을 약속했다. 본래 김옥균 등은 미국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지라 일본의 접근은 선뜻 받아들였다.


1884년 7월 개화파는 정변을 기도하나 날짜와 구체적 계획을 잡지 못하였다. 여러 번 회합을 하다가 그해 9월 17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방안과 계획을 상세히 발표한다. 그들은 민씨 정권의 친청나라정책에 대항하여, 기존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 보다는 온건 개화파와 민씨 척족의 연합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실시하기로 했다. 한편 12월초에 있을,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임명된 우정국의 개설 기념 및 건물 낙성식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 종래의 신식군대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군인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정변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어 일본에서 귀국한 서재필, 서재창 형제가 이끄는 조련국의 병사들,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웅렬이 지휘하는 함경남도관군을 동원하기로 한다.


한편 개화파는 일본사관학교 유학생과 서재필, 서재창이 이끄는 조련국 병사들, 윤웅렬의 남병영 외에도, 정변을 일으켰을 때 민씨 정권을 비호하는 청나라군 및 지역의 위정척사 세력, 영남 남인세력 등의 미구에 있을 반격에 대한 군사 문제를 일본측과의 교섭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또한 자신들이 개혁정책을 실현하는 자금 및 재정 확보 문제 역시 일본을 이용하여 해결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일본 공사관측을 통해 교섭하였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는 개화파의 군사, 재정 문제를 도와 일본의 대륙 진출에 걸림돌이 되는 청나라와 민씨 정권을 내몰고 대륙 진출의 기반을 차지할 생각으로 일본군대 및 영사관 경찰 병력의 동원과, 정부 차관 제공을 약속하였다.


청나라 군사의 움직임


1884년 2월경부터 조선에 주둔하던 5,000여 명의 청나라 군사가 서서히 철수하는 조짐을 보이자 일각에서는 바로 단행하자고 하였으나, 김옥균, 박영효 등은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였다. 또한 일본에 유학중이던 사관생도들이 귀국하지 않았음을 들어 일단 보류하였다. 1884년 봄,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안남(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청나라는 1884년 5월 23일경 조선 한성부에 주둔시켰던 나머지 3,000여 명의 청군 중 1,500명을 안남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한성부에는 1,500명 청군만이 남게 되었다.


1884년 8월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 해군 함대가 청나라 해군의 푸젠함대(福建艦隊)를 격파하고 이후 전쟁 상황이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김옥균 등 개화당은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보고 1884년 9월(음력 8월)부터 정변을 준비,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옥균은 당시 청나라가 안남전선에 묶여서 조선에서 대규모 군사 행동으로 전선 두개를 만들 여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고, 자칫하면 조선에 남은 1,500명 중에서도 일부 빼갈 수 있으리라고 봤다. 안남 문제로 청과 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고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축출하려는 일본은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통해 급진 개화파에게 접근한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초, 청나라가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당은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개입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정변 단행을 기획한다. 10월 30일 서울로 돌아 온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는 종전 개화파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호의를 보이면서 접근해 왔다.


그해 8월부터 본격 훈련에 들어간 서재필의 조련국 병력으로는 사실 부족했고, 윤웅렬의 함경남도의 병영에서 병력을 전부 차출하는 것은 힘들다고 본 급진 개화파는 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김옥균 등 개화당은 우선 부족한 무장능력을 보충하고 청나라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하였다. 다케조에는 공사관 병력 150명을 지원할 수 있고, 일본 정부로부터 일화 3백만 엔을 얻어내 빌려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들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몰래 상의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무기와 자금을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시도하여 빌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과 사관생도들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강경 개화파는 위정척사파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고, 위정척사파와 동시에 위정척사파 타도에 소극적이었으며, 일부 부패한 관리들을 옹호하는 척신 정권 및 온건 개화파에 대한 제거까지 계획했다. 명성황후 주변의 척신 세력들은 물론이고 민영익, 이조연 등 온건 개화파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우자, 이에 당황한 함경남도 군사를 동원하기로한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웅렬과 외무 아문주사 윤치호 부자는 다소 머뭇거렸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때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김옥균과 서광범에 말하였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밀의한 끝에 일본군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기도하였다. 그때 다케조에 공사는 11월 16일자 보고 문서에서 “정변이 나면 그(김옥균)를 보호할 방침이며, 정변이 나더라도 우리의 1개 중대로써 청국의 현재 병력(단지 5~6백 명으로 추산됨)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라고 장담하였다.


이러한 일본 공사의 호언장담에 고무된 김옥균 일파는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 개화파들은 연회가 열릴 즈음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행동 전위대로 나선 서재필을 비롯한 토야마 군관학교 출신 사관생도들이 초청한 사대당 요인들을 모조리 암살하려 했으나, 겨우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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