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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전 오늘,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 편집국
  • 등록 2020-12-08 01:06:35
  • 수정 2020-12-08 01: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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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년 12월 8일. 日 해군, 하와이 기습공격…
  • 군함 6척 침몰, 미국인 2403명 사망

美, 일본대사관이 최후통첩 보내기 전 감청으로 공문 내용 미리 파악했지만 '전쟁 개시' 언급 없는 모호한 내용에 선전포고라고 생각 못해 대응 실패

오늘 8일은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지 79년이 된 날이다. 1941년 12월 8일 아침(도교 시각),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기습 공격을 단행했다. 미국 기록에 따르면 전사자 2403명, 부상자는 1143명이었다. 

공습으로 전함 네 척 등 배 여섯 척이 침몰했고, 항공기 188대가 파괴됐다. 당시 일본의 80배에 가까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일본이 기습한 것이었다. 미국은 특히 일본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공격했다는 데 분노했다. 그런데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 걸까, 못 했던 걸까?


◇공습 1시간 뒤에 전달한 '최후통첩'


당시 일본은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4국의 전략물자 수출 금지 조치로 석유 수입이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 등은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 침략을 계속하자 수출 금지 조처를 해 일본을 압박하고 있었죠.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일본은 미국과 협상하는 동시에 군사 행동에 나서는 것도 저울질하고 있었다.


워싱턴 DC 시각 기준으로 진주만 공습이 이뤄지기 약 11시간 전인 12월 7일 오전 2시 38분 주미 일본 대사관에 암호 전문이 도착한다. 

공습 20분 전인 오후 1시(하와이 시각 오전 7시 30분)까지 코델 헐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전달하라는 지침도 붙어 있었어요. 이 전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더는 미국과 협상하지 않겠다.' 일본이 미국에 보내는 최후통첩이었다.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오하우섬 진주만에서 미국 군함이 일본군의 기습 공습을 받아 연기를 내뿜었다. 

미 군함 웨스트 버지니아호와 테네시호.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타격했고, 미국은 이에 크게 분노했다.


진주만 공격의 실상

그런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일본 대사관에서 암호 전문을 번역하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오후 1시'에 맞출 수 없게 됐다. 주미 일본 대사가 미 국무장관을 찾아가 전문을 읽기 시작한 것은 7일 오후 2시 20분경이었다. 이미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고도 1시간이 지난 뒤였죠. 헐 국무장관은 이미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였다. 

그는 모르는 척 전문 내용을 들은 뒤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문서는 공직 생활 50년 동안 처음"이라며 분노를 표시했다.


◇'이게 선전포고?' 갸우뚱했던 미국


그런데 여기 반전이 있습니다. 미 정보기관이 일본의 암호 전문을 감청해 해독했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7일 오전 10시쯤에 일본 정부가 보내려는 해당 문건을 백악관에서 받아봤다. 

진주만 공습 3시간 20분 전이었다. 일본 공습에 대비할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라' 정도의 지시만을 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는 일본이 보낸 최후통첩이 제대로 된 선전포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07년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는 전쟁을 하려면 '사전에 명백하게 선전포고를 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한다는 조건부 최후통첩을 보내야 한다'고 협약을 맺었다.


진주만 공격을 진두지휘한 나구모 주이치 중장 (1887-1944)

그렇지만 일본이 대사관에 보낸 최후통첩은 영어로 번역했을 때 약 5000단어 분량이었지만 '개전(開戰)' '전시 상태' '무력 사용' 같은 표현은 없었습니다.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가 아니라 각서(memorandum) 형식이었다.


이 문서의 핵심은 각서 뒷부분에 담겨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일본 정부는 미합중국 정부의 태도로 미루어 앞으로 교섭을 계속할지라도 타결에 이를 수 없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음에 관하여 이렇게 미합중국 정부에 통보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이를 읽은 루스벨트 대통령 등 수뇌부는 일본이 외교 관계를 끝내겠다고 선언한 것이라 이해했다. 선전포고라고 생각하기는 모호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제대로 된 선전포고를 할 생각은 없었고, 진주만 공격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는 '시늉'을 했다는 해석이 많다. 일본 군부에서 '비밀리에 공격이 이뤄져야 하니 평화회담을 공격 시점까지 질질 끌어라'라는 지시를 했다는 연구도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다. 전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는 1948년 열린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사형된다. 죄목에는 선전포고가 없었던 진주만 불법 공격도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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