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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화신 정월 나혜석을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0-12-09 22: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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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


나혜석의 비극은 너무나 명석했고 시대를 앞서간 그녀의 사상과 생활방식이 그 시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72여년이 지난 지금,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 문학과 그림 모두 뛰어났던 예술가로, 여성인권신장을 외친 여성운동가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나혜석이 바로 72년전 오늘인 1948년 12월10일의 삶을 마감한 채, 원효로 쌍굴다리 앞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날이기도 하다.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그리고 차미리사와 같은 여성지식인로 평가받았다.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이다.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출생으로 수원 삼일소학당과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에는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발행하기도 했다. 1921년 그가 <개벽(開闢)>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한국 근대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이광수와의 작품경향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유학생 주인공들이 거창한 문명개화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소설 안에서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는 데 비해 나혜석의 글쓰기는 대중을 선도하기보다 대중과 공동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는 평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로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염상섭, 김동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고백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했으며 1920년-1930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경희>는 이러한 고백체 소설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임신•출산으로 여성이 갖는 좌절 및 고난과 자신의 외도 사실을 상세하게 고백한 나혜석, 배신당했던 일을 고백했던 김일엽, 성폭행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그랬던 자신을 글로 유린했던 남성 문학인들과 맞선 김명순 등 절절하게 자신들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냈던 여성 작가들은 탕녀로 낙인찍혀 문학사에서 매장된 반면, 이들을 탕녀로 만드는 일을 주동했던 김동인, 김기진 등의 남성 작가들은 이전까지는 어떠한 평가나 굴곡 없이 근대 고백소설의 모범으로 문학사에 기록되었으나, 현재의 학계에서는 해당 작가들의 행동과 관련된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2016년 문화계 성추문 폭로 사건이란 큰 일을 겪은 현재 한국의 문학계가 앞으로 과거의 이러한 과오들도 청산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여남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또한 그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일찌감치 명절이 여성들에게 고단한 날임을 고발하였다. 그가 명절의 고단함을 지적한 것은 후일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나혜석은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혼 비슷한 결혼을 통해 비극을 예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 서로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면서 불행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콜중독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에 온몸으로 부딪혔던 그는 행려병자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야 했다.

오늘 12월 10일은 그런 의미에서 여자 나혜석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계기가 아닐까 싶다.

화가이자 문인, 독립운동가였던 나혜석의 사망 79주기다. 화가였고, 문인이었던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록은 "본적, 주소 미상. 연령 53세. 신장 4척 5촌. 체격 보통. 기타 특징 없음. 헌옷에 소지품 없음. 사인은 병사. 사망 장소 시립 자제원"이었다. 나혜석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열었던 1921년 개인전에는 5000여명이 몰렸고 20여점이 고가에 팔렸다고 한다. 세상의 주목을 받던 화가가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혜석의 인생은 남편과 떠난 세계여행을 통해 바뀌기 시작한다. 여성으로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지만 여행 중 만난 최린과의 불륜 때문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의 이혼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데 '이혼고백서' 때문이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서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고발하면서 스스로 독립된 주체로 살겠다는 선언이었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나혜석은 이를 발표하고 불륜 상대인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혼고백서와 정조 유린 손해배상청구를 당시 조선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혜석은 고립됐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절과 양로원 등을 전전하며 그림을 그리다 결국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게 됐다.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고 엘리트 신여성이었기에 혜택 받은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조선 사회의 봉건적 인습에서 비롯된 남녀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여성운동의 선구자였기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이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에 희생됐다고 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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