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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0-12-14 23:08:01
  • 수정 2020-12-14 2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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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흥남철수작전 <70년전 오늘 1950년 12월15일의 흥남 철수작전의 드라마>
  • '1950년 12월 겨울, 흥남에선 정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문재인대통령 부모, 흥남부두 철수 당시 빅토리아호 선박에 몸실어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 Hungnam evacuation)는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구출시킬 목적으로 실행된 대규모 철수 작전이다. 당시 유엔군의 작전 암호명은 작전 암호명은 비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로 알려져 있으며[1], 철수 작전이 큰 피해없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크리스마스의 기적(Miracle of Christmas)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작전 성공 보고를 받은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언급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하였지만 중공군이 개입하였고 11월 27일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 등을 겪으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엔 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특히 장진호 전투 전투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인민지원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하였다. 이어 12월 15일 미국 제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한편, 평양은 이미 12월 4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12월 6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철수 작전

김백일 제1군단장과 제10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은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피난민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1950년 12월 겨울, ‘흥남에선 정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사실이다.  미군과 한국군의 공식 전(쟁)사는 하나같이 ‘중공군’ 개입과 미군·한국군의 함흥 교두보로의 후퇴, 그리고 흥남 철수로 끝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만 미군 공식 전사가들은 흥남 철수 과정에서 이뤄진 피란민 소개를 군사작전 차원에서 다각도로 평가한다. 정보·작전·군수·민사의 영역에서 일자별로 세세히 서술되며, 종국에는 다양한 통계로 수치화된다.

이와 달리 국군 전사는 이념 전쟁의 승리, 즉 “단순히 군부대의 철수 작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산정권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유를 찾아 북한 지역을 탈출하려고 하는 민간인들을 철수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쟁의 역사가 일순간 프로파간다(선전)로 넘나드는 일이 왕왕 생긴다.


국군 수뇌부들이 “북한 겨레”에 대한 “동포애의 발로”로 이 숭고한 일을 했다고 자임하는 것도 참 흥미롭다. 이런 일화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 제3사단장 최석 준장 등 주로 장군들이 등장한다. (영관급 참모도 몇몇 있지만 잘 주목받지 못한다.)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 과장된 자랑은 절정에 이른다. 정일권은 당시 흥남에 없었지만, 보고받거나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피란민 소개와 관련한 이들의 역할과 공로를 보증해주는 스피커가 된다. 심지어 너무 몰입한 나머지 배에 타지 못한 “북한 겨레” 피란민들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깊이 느끼고 참모총장을 사임하려 했다 밝힌다.


마지막 수송작전에 참여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선장 레너드 라루.

김백일과 송요찬의 북한 주민에 대한 동포애를 서술하는 정일권의 회고도 중요하다. 이들은 1948년 10월 이후 전남 여수·순천과 제주에서 상당수의 지역주민을, 민간인을,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던 지휘관이다. 

이런 자들이 흥남에 모여든 북한 피란민들에게 “동포애로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거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들의 인식에 피란민들은 “국군이 북진 깃발을 휘날리던 때 열광적으로 환영에 나섰던 사람들”이고 “태극기 흔들며 좋아했던” “노인과 아이들, 아낙네들, 여학생들”이기 때문에 북한 당국에 “반동으로 몰릴” 사람들이다. 헌법에 뭐라 쓰였든, 남한에 있든 북한에 있든, ‘빨갱이’는 죽여야만 하고 ‘빨갱이’와 싸우고 자신들을 환영하면 그게 민족·겨레·동포인 거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국민인 거다. 함흥과 흥남으로 들어온 20만~40만 명은 반공 ‘자유 피란민’인 거다.


자유 피란민을 보호하고 다 배에 태워야 하는데,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그의 참모들이 이에 냉담하니 김백일과 송요찬은 얼마나 분통 터졌을까? 송요찬의 말은 강렬하다 못해 섬뜩하다. “우리가(김백일 군단장과 나는) 이들을 버리고 가느니보다는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게 낫다고 주장했어요. 어차피 공산군의 손에 죽을 테니까요. 최후적으로 우리 국군은 육로로 퇴각할 테니 우리를 수송할 선박에 피란민을 태워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어요.”(<민족의 증언> 제4권 78쪽) 사랑하니까 죽이겠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12월19일 북에 없었던 흥남 철수 주역들


이들의 말과 행적을 관련 공식 문서들과 비교해가며 추적할수록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들은 언제까지 흥남에 남아서 피란민 소개를 위해 갖은 애를 썼을까? 항상 나오는 일화가 12월19일 국군 제1군단 사령부에서 열렸다는 피란민대책회의다. 정일권의 회고에서 나온다. 정일권이 장군들의 발언을 옆에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서술된다. 내용을 압축하면 이런 거다. 김백일·송요찬·최석 장군이 하나같이 피란민들을 데려가는 것이 국군의 사명이라는 결의를 밝히자 이에 알몬드 장군이 크게 감동받아 “훌륭하고 아름다운 겨레 사랑”에 최대한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30대에 육군 최고지휘관 자리에 올랐고 최장수 국무총리도 한 정일권이었지만, 각색에는 영 소질이 없었나보다.


전투영웅 추모행사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의 주역 등 유엔참전용사와 가족 77명이 대한민국을 방문.

진짜 12월19일에 대책회의가 열리기나 했을까? 분명한 건 송요찬의 수도사단은 12월16일 흥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해 18일 오후 강원도 묵호항에 상륙했다. 김백일의 제1군단도 12월17일 철수해 이후 강원도 삼척으로 갔다. 최석의 3사단은 그보다 일찍 함경북도 성진에서 부산으로 철수했고, 흥남으로 들어온 일부 부대도 철수했던 차다. 그렇다면 국군 제1군단과 사단 지휘관, 참모들은 자기 부대를 먼저 보내고 피란민 소개의 사명을 위해 흥남에 계속 남았다는 말인가? 12월19일은 피란민들이 본격적으로 배에 타기 시작한 날이다. 그때 피란민들은 김백일과 송요찬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두 장군의 자취를 찾을 수나 있었을까?


피란민 옆에 장군들은 없었지만, 대신 현봉학이 있었다. 미 제10군단 통역관이자 민사부 담당 고문관이던 그는 함흥이 고향이었고, 기독교인, 미국 유학파 의사(수련의)였다. 그는 자신만 바라보는 고향의 기독교인과 “반공 인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한다. 이들을 구원하려면 알몬드 장군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장군의 입장은 완고했다. 군 전력을 최대한 보전하고 모든 병력과 군수품의 철수를 지휘하는 처지에서 보면, 피란민 소개는 이를 명백히 방해하는 요소로만 여겨졌다. 군 병력과 군수품의 이동을 방해하고, 무엇보다 피란민 대열에 “제오열(반대 세력) 및 불순분자”가 침투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알몬드 장군뿐 아니라 참모들 사이에 팽배했다.


알몬드와 현봉학의 역할

군은 언제나 민사를 군사작전에 종속시킨다. 이렇게 생각하는 미군 사령관과 참모들을 향해 현봉학이 “함흥과 흥남의 이십만 민간인이 어디로 피란을 갈 수 있겠느냐고, 적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던 것이 통했다고 보는 건 정말 순진한 믿음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노력이 무의미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12월9일 알몬드 장군이 제10군단 민사부장과 함께 현봉학을 불렀고, 그 자리에서 기독교인과 유엔군에 협력했던 민간인 4천~5천 명의 소개와 철수를 지시했으며, 이 일을 현봉학 등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알몬드 장군과 그의 참모들이 피란민을 소개하기로 한 결정에 작용했던 배경과 힘들, ‘작전’ 과정에 대해 이제 반공 신화에서 역사 영역으로 가져와 실증적으로 엄밀하게 확인해야 한다.


피란민들의 소개는 장진호에서 “뒤로 전진”한 미 제1해병사단이 철수했던 12월12일에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본격적인 것은 12월16일부터였다. 현봉학은 12월21일 제10군단 사령부가 철수하는 배에 함께 승선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22일부터 24일 아침까지 계속된, 이때야말로 필사적이었던 피란민들의 사투는 국군 수뇌부도 현봉학도 보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닫히는 (수송선) 쇠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쇠문에 끼이는 사람, 쇠문에서 떨어져나가는 사람, 비명과 통곡이 뒤섞인 처참한” 현장을 정일권 장군에게 생생하게 전해준 것은 누구였을까? LST 온양호 항해사 황호채의 증언에 비슷한 대목이 있긴 했다. 2700t 선박에 1만7천 명을 태웠다는 말을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 유명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L. P. 라루의 기억에도 그 비슷한 장면이 있을까? 그러나 그는 22일 저녁부터 시작해 23일 아침까지 8천t 선박에 1만4천 명을 모두 태운 것이야말로, 침몰되지도 않았고 선상 반란도 없었음을, 무엇보다 배에서 이루어진 출산(김치1-5의 탄생)을 기적이라고 말할 뿐이다. 고난과 기적에 대한 종교적 뉘앙스의 충만한 감사의 어투는 곳곳에 보이지만, 당시 일에 대해서는 담백하게 회상하고 있다.


한반도 탈분단 평화의 역사를 새로 쓰는 지금, 우리에게 ‘흥남 철수’란 어떤 의미로 전환돼야 할까? 과거처럼 흥남부두의 현장과 철수·소개 사건에서 벌어진 이산의 비극성을 쥐어짜며 이념전쟁으로 채색된 반공·냉전의 신화이자 기억으로만 존재해야 할까? 언제까지 냉전의 공룡 화석 같은 김백일 동상을 둘러싸고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는 것을 반복해야 할까?


이제는 흥남 철수를 둘러싼 기억의 전쟁 이면에 억눌려왔던 또 다른 목소리와 진실에 주목할 때가 왔다. 김백일, 송요찬, 알몬드, 맥아더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반공·냉전의 각색 안에서 과장되고 자기 자랑 일색이지 않았나. 전쟁과 이산의 고통과 비극을 휴머니즘으로 채색하는 것도, 자유 진영·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냉전적 대결과 반공주의라는 액자 안에서나 허용될 뿐이었다.


탈분단의 흥남 철수


그렇다면 냉전과 반공의 액자 대신 반전과 평화라는 액자 속에 어울리는 그림의 요소는 무엇일까? 난 ‘자유’ 재현을 걷어낸 피란민‘들’의 이질적인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이 웅변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빨간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1950년 12월 ‘생존’을 위해 월남했던 피란민들의 상황에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왜 이들은 혹한기에 가족 동반으로, 다시 말해 노인과 아이는 물론 때론 만삭의 임신부를 동반해 절박하고 긴급하게 피란해야 했을까? 생존을 위한 피란이 지시하는, 그러나 오랫동안 감춰진 다른 지층들은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또한 월남한 이들의 피란(지)의 삶을 ‘자유를 위한 고난’이라는 서사에서 해방시키면 어떤 삶의 모습이 펼쳐질까?


문 대통령은 "흥남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젊은 부부가 남쪽으로 내려가 새 삶을 찾고 그 아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돼 이곳에 왔다"면서 "참으로 가슴 벅찬 감사와 감동의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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