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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0-12-15 22: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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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년전 오늘,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당선과 보통사람들>
  • “동교동, 상도동계의 분과 군부정권의 연장”


한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87년 12월 16일에 실시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16년 만에 치뤄진 대통령 직접선거로, 실로 오랜만에 치러진 직선제 선거이니만큼 참여 열기가 매우 뜨거워 투표율은 89.2%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2위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득표율 8.6%p, 194만5,157표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군부정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롤러코스터 선거였지만[3], 가열차게 민주화 투쟁을 한 이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선거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영호남 갈등은 더욱 깊게 패여만 갔고, 특히 PK와 호남 사이의 갈등이 확연히 심해진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차기 후계자인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재차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하기에는 6월 항쟁 등 국민적 저항이 거셌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직선제를 포함한하여 야당과 국민의 요구사항을 대폭 수용한다는 6.29 선언을 통하여 노태우는 일약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건국 이래 최초로 여야가 원만한 합의를 이룬 헌법 개정 작업이 추진되었다.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29일 확정·공포된 개정 헌법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라는 규정 외에 임기를 단임 5년으로 하고,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대폭 개선하여 현재의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투표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관심을 모은 후보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그리고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인사들은 통일민주당을 창당, 결집하고 김영삼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상당수 통일민주당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는데, 마침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6년 “나는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겠다”고 했다. 통일민주당 지지자들 상당수는 두 사람의 대의명분과 약속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실제 김대중은 1987년 7월 10일 기자회견에서도 "나는 대통령이 되는 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언하였으나, 후술된 지지층의 기대나 알게 모르게 이어진 서로간 갈등, 본인의 대권 욕심 등을 가둬놓을 수가 없었는지 바로 다음 날인 7월 11일 인터뷰에선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발언하면서 불출마 선언을 하룻밤 만에 뒤집게 된다.[6]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격돌을 예고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김영삼의 사이는 일단 표면적으론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였다. 김영삼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화끈하게 밀어준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이후 신민당 총재선거에서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적이 있었다. 5공 시절에는 둘이 함께 민주화투쟁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약 16년에 걸쳐 김대중과 김영삼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던 셈이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손을 맞잡고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이었건만, 점점 그들 사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 위에서는 계속 양김의 훈훈한 모습만을 서술해놨지만, 물밑에선 오래전부터 신경전이 치열했다. 일단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 끝에 패배 이후로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탄압을 받고 있었다. 김대중은 유신 이후로 일본망명, 국내납치, 체포, 투옥, 사형선고, 미국망명 식으로 계속 떠돌면서 세력이 많이 약화돼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김영삼은 유신체제에서도 계속 야당 국회의원과 총재로 활동했고[8], 5공화국 들어서도 가택연금과 정치활동규제에 묶이긴 했지만, 측근들을 내세워서 상도동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9]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1985년 신한민주당,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은 모두 김영삼계가 주도하고 살아남은 김대중계 일부 인사가 가담하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통일민주당 내에서 지역 지구당 위원장(그러니까 국회의원 후보)와 당직 인선은 대체로 김영삼계 위주였다. 김대중계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6월항쟁 이후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 대비해서 미조직 지구당을 창당하고, 지역조직을 정비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제안을 김영삼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회피하면서 불만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6월항쟁 직후 양김 후보 단일화 문제가 불거지자, 홍사덕 등이 어차피 둘 다 양보하지 않을 기세니 경선을 하라는 주장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주요 지구당과 당직을 김영삼계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내 경선은 결과가 뻔할 것이라는 주장과 또 당내경선을 하게 되면 분명 정권의 돈을 앞세운 정치공작으로 당이 엉망진창될 것이라는 지적에 경선제안은 묻히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양김 간의 자발적인 합의였는데, 이게 또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물밑 협상은 지지부진 했고, 위에서 언급된 당내 조직책(국회의원 후보) 선정 문제까지 얽히면서 점점 양 세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민주화운동세력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크게는 후보단일화(약칭 후단), 비판적지지(약칭 비지) 그리고 독자후보추대(약칭 독후)로 나뉘었는데 후보단일화는 군부와 보수세력에 비교적 거부감이 적은 김영삼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자는 사람들이었고, 비판적 지지는 김대중의 선명성, 좌파성에 주목해서 우리와 비교적 생각이 가까운 김대중을 밀자는 주장이었다.[11] 특히 운동권과 노동운동 쪽에서는 소수의 독자후보파를 제외하면 다수가 비판적 지지, 즉 김대중 쪽이었다.[12] 독자후보추대는 더 이상 그들 기준 보수(리버럴) 야당에 끌려다니지 말고 진보(사민주의) 후보를 세워서 스스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먹혀 민중후보 백기완 추대로 결집했다.


기다리다 지친 재야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들이 중심이 돼서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두 사람의 합의를 촉구했고,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마침내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그 합의는 성사 직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15] 전 민주당 대표의 술회는 이렇다.

“재야도 두 사람을 놓고 선호가 갈렸고, 김대중 씨 쪽이 더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선가능성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김대중 씨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반 국민 중에도 상당히 많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이번만은 김대중 씨가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 씨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영삼 씨가 대선 후보를, 김대중 씨가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 씨가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더라. 그러니까 후보도 당권[17]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18] 김대중 씨가 승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더러 발가벗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거냐?’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김대중이 오랜 미국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김영삼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세력도 상당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양보를 권유했다. 김 추기경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경우 군부가 용인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정변이 일어날 우려를 했다"는 내용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19][20]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야권 원로들이 김영삼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언젠가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합의할 것이라 믿고 있었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10월 25일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국민은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단일화 발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진행된 토론회에 나타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자못 싸늘했다. 이날 토론회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면서도 서로 외면한 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연사의 연설이 끝난 뒤 마침내 김영삼이 연단에 올랐는데,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청중 사이에서 "우~" 하는 야유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21] "(대선 후보를) 사퇴하라! 사퇴! 사퇴! 사퇴!" 이런 외침도 터졌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청중이 항의하려 했지만, 야유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결국 김영삼은 정치인생 30여 년에 처음 겪는 굴욕감에 떨며 고려대학교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반면 김대중이 연설대에 올랐을 때,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은 마치 그의 개인 유세장처럼 바뀌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김대중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뒤이어 그의 지지자들에게 목말이 태워진 채 고려대학교 앞 안암로를 행진하기까지 했다. 이때 김대중은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라고 외쳤으며, 결국 다음날, 김대중은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전격 탈당한다고 선언한다.


당직과 지역조직 인선에서 상도동계한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던 동교동계는 계파의 우두머리였던 김대중과 함께 일제히 탈당하였다. 김대중은 자기를 따라나선 정치인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출마함으로써 야권은 분열된 채 선거를 맞았다.


이렇듯 양김이 분열하여 동시에 출마선언을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후보단일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야권에서 박찬종이 삭발농성을 하고 이철, 홍사덕, 조순형 등 일명 7인의 서명파는 김영삼과 김대중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촉구하였으며,[25] 김대중이 상술한 재야쪽의 중재안을 다시 들고나와 김영삼측에 자신이 당권을 갖는 것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당시 김대중의 참모들 가운데서는 조윤형처럼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 모두 양보해버리자는 의견을 개진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설 중엔 김대중이 대선출마 포기조건으로 차기 총선에서 자신에게 국회의원 공천권의 20%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김영삼에게 최후의 제안을 하였으나 김영삼이 그것마저 거절했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이로 인해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정신승리를 위해 한화갑 등이 YS와의 결별을 주장하면서 들고 나온 것이 이른바 4자 필승론이었다. 참고로 당시 국내 유권자 수는 25,127,158명(2510만)이었다. 


허나 1987년 12월 16일이 되어 대선이 치뤄지고 대선 개표가 시작되자 이 4자 필승론은 처참히 부숴졌다. 후술된 선거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 선거 판세는 4강이 격돌하기보다는 김종필이 한참 처지는 3강 1약의 구도로 치뤄졌다. 김종필은 연고지인 충남에서만 승리했을 뿐, 자신하던 충북 지역도 막상 결과는 노태우, 김영삼에게 그것도 큰 격차로 패해 3위에 그치는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노태우는 지역색이 옅은 스윙스테이트격인 인천, 경기, 제주에서 40%대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고,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던 충북과 비교적 보수 성향이 우세하던 강원도에서도 1위를 보이며 표를 끌어모은다. 그리고 유권자수가 많은 서울, 부산, 경남, 충남 등에서도 고르게 2위를 하며 상당한 표를 차지해 2위와 격차를 꽤 벌린다.


이렇게 예상이 빗나간 가장 큰 원인으로는, 수도권 호남 출신자들이 김대중에 몰표를 줄 것이고 20대 대학생들도 김대중에 표를 많이 줄 것이며, 그 외의 수도권민들로부터도 적당히만 득표하면 수도권 표를 확실히 챙길 수 있는 계산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이 당시 수도권의 인구는 주로 호남 출신, 수도권 토박이, 충청 출신, 이북5도민[30]이었는데 이중 호남 출신이 제일 많긴 했지만 이들로부터도 몰표를 받지 못했고 수도권 토박이들과 이북5도 출신들은 빨갱이 프레임이 씌여 있던 김대중을 강하게 배척했다. 즉, 당시 선거구도에서 4자 필승론은 당시 대통령 선거제도가 미국식 선거인단제 내지 결선투표제를 체택했을때에나 효력을 발휘했지 결선투표제가 없는 직선제 투표에서는 철저하게 빚나갔다. 다음해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4자 필승론에 따른 이론이 효력을 발휘해서 김대중의 명예가 어느정도 회복되기는 했지만 여기서도 1당은 아니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당시 대선도 금권, 관권선거가 횡행하긴 했다. 안기부를 통한 뒷공작이나 불법정치자금을 이용한 조직동원도 있었고, 군인 등의 부재자 투표를 조작하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과거에 비해서는 그 정도가 많이 낮아졌긴 했는데, 이미 한번 군부에 저항해본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전체적인 선거 부정 강도가 많이 줄어든 것. 당시 야권쪽 일부 인사들의 회상에 의하면 야권 지지자들이 이때의 선거 부정 논란들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은 표시하면서도 예전에 당했던 말도 안되는 부정 행위들보단 훨씬 사정이 나은 선거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야권이 선거에 패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결국 정확한 인구통계학적 데이터로 여론의 동향을 읽는 데이터분석기술이 약해서였고, 이는 이후 김영삼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이 여론조사 분석에 공을 들이는 계기가 된다.[31] 국가 행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집권 세력이라는 점에서 노태우 측은 훨씬 유리했고,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와 안기부에서 얻어온 데이터를 토대로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내렸고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전술한 것처럼, 선거구도가 이렇게 정해지면서 각 후보가 자신의 지역을 기반해서 결집하는 구도로 선거양상이 흘러갔다. 네 명의 유력한 후보들은 각기 출신 지역의 지역감정을 고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선거는 한국 선거의 역사에서 지역감정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된 최초의 선거라 할만했다. 가령 노태우 후보는 전북 전주에서 유세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7년 전 5.18의 원흉인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 후보에 대한 전북 주민들의 반감으로 유세 현장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했고, 결국 유세가 중단되었다. 이 시위는 KBS와 MBC 9시 뉴스에서 방영되었다.


이후 김대중이 광주에서 80만 인파를, 김영삼이 부산에서 100만 인파를 동원하자, 각 후보의 연고지역별로 유권자들이 뭉치는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노태우는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TK)의 지지와 함께 다른 지역(여권 성향이 강한 경기도, 강원도와 충북, 서부경남)의 유권자들을 모았고, 김영삼은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PK)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김대중은 전라도, 김종필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당시 빅3 후보들은 여의도광장에 100만 인파를 운집시키며 세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각 후보들이 경쟁하듯 대규모 옥외집회를 열었던 것은 그때의 대통령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언론에 공표되지 않았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다만 한국갤럽 등이 조사를 했고, 실제 선거결과와도 비슷하게 나타났으므로 여당(민주정의당)과 전두환 정권은 여론의 향방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민정당 측에서 자체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결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반대로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경우에는 이미 12대 총선에서 안기부가 실시했던 여론조사가 빗나갔던 경험이 있던데다가[32] 민주화 직후라서 표본선정을 어떻게 해야하느냐의 문제도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신뢰도가 의심가던 상황이었던데다가 오랜기간 발이 묶여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역량도 부족했는데, 이 때문에 구체적인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선거운동을 치렀고 여기서 대선의 향방이 상당히 갈라졌다.


다만 대선 막판까지만 해도 원래 지지는 김대중이 좀 더 높았으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영입으로 부동표가 몰리면서 김영삼이 노태우를 제치고 40%의 지지율로 1위에 올라섰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었다. 예를 들어 워싱턴 포스트나 타임(주간지) 등은 미국 국무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김영삼이 앞서고 있다"라고 보도하는 등, 당시 판세를 보면 김영삼이 1위, 노태우와 김대중 후보가 2위 자리를 다투었고, 김종필이 4위, 신정일이 꼴찌였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의 보도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김영삼이 대선 직전까지 노태우와의 격차를 크게 좁히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당시 노태우 후보 진영에서 경쟁 후보 진영을 분석한 내용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일부 공개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영삼 후보 진영 - 야당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를 분석해 보니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군정종식(軍政終熄)이었다. 이 구호는 식자(識者)들에게 특히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영삼 씨는 시종일관 이 구호를 외쳐 댔다. 이것이 내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처음에는 신선하게 느껴지던 이 구호가 시간이 흐를수록 유권자들에게 식상함을 자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똑같은 구호로 일관하지 않고 단계별로 다양하게 발전시켰더라면 내게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대응 방안을 궁리한 끝에 "군정종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군정을 종식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로 했다.[35]

김대중 후보 진영 - 김대중 씨는 대중(大衆)을 휘어잡고 바람을 일으키는 선동(煽動)의 명수였다. 당대의 1인자라 할 만했다. 만일 6.29 선언이 없었다면 그의 이런 강점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6.29 선언이 그의 강점의 핵(核)을 제거했다.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을수록 그 위력은 더욱 폭발적인 효과를 거두게 마련인데 압력이 전혀 없는 상황으로 바뀌어 폭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종필 후보 진영 -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향수를 갖고 있는 보수층을 겨냥했다. 여권 표를 분산시킬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가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80년 초에 "유신과 관련해서 책임이 없다."고 회피했던 처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치열한 선거 국면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북풍이 몰아닥치면서 선거판도는 뒤바뀌기 시작한다.


선거가 유례없이 치열한 지역대결의 장이 되어가던 무렵, 선거를 약 2주 앞둔 1987년 11월 29일 북한에 의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발생한다. 선거 막판에 터진 북한의 잔혹한 테러에 수많은 국민들이 경악하였고, 이는 휴전 이래 지속된 각종 안보 불안으로 야기된 안정논리와 반공주의가 다시 한 번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대중들 사이엔 김대중이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야권 출신 인사로서의 한계 때문에 군부를 제대로 지휘할 수 없어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걱정이 돌기도 했다. 이른바 북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김대중에 대해서는 1970년대 일본에 망명해 있던 시절에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의혹이 워낙 짙었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와 북한 간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김영삼 후보도 본인은 몰라도[38][39] 김대중과 같은 당 소속이었으니 결국 대통령이 되면 김대중에게 이용당하여(...) 북한에 좋은 일 하는 것 아니냔 시선도 있었다. 나중에는 김대중 후보가 북한에게 부탁하여 KAL기 테러를 일으켰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대선 분위기는 안보를 강조하던 여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어갔다. 이로 인해서 보수 지지자들이 노태우로 결집하면서 김종필이 표 손해를 많이 봤고, 김영삼도 12대 총선과 비교해보면 TK 지역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는 등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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