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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0-12-22 00: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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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희대의 비극적 누명을 쓰다.
  • 126년 전 오늘, 간첩조작극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국가적으로 한 명의 개인인 장교 드레퓌스를 매장시키려고 한 사건이다.   목하 한국 사회도 늘 그랬듯이 진실 공방이 진행 중이다. 당사자들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또 자신이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딱 126년 전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오늘날 진실 공방이나 마녀사냥의 전략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12월 22일 프랑스 군사법정은 만장일치로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에게 종신유배형과 공개 군적 박탈을 선고했다. 유대계 프랑스 장교인 그가 적대국 독일에 군사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였다. 당시 헌법이 정치범 사형을 금지했기 때문에 종신형은 최고형이었다. 군적 박탈식은 선고 2주 후 집행됐다. 육군사관학교 광장에서 드레퓌스의 계급장, 단추, 바지 옆줄은 모조리 뜯겨졌고 군검도 조각났다. 군중의 야유도 있었다. 태워 죽이지 않았다는 점 말고는 마녀 화형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시 2주 후 드레퓌스는 유배지를 가던 도중에도 군중에 둘러싸여 폭행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끝난 것 같았던 드레퓌스 사건은 어떤 인물 때문에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거짓을 보고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 마리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었다. 피카르는 본래 드레퓌스 유죄를 의심치 않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참모본부 정보부장 자격으로 첩보자료를 보고 관련 혐의자를 조사하면서 드레퓌스 유죄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냥 덮으라는 상관의 요구에 불응하고 조사를 계속했으며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 받았고 뒤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피카르보다 더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온 인물은 에밀 졸라다. 반(反)유대주의를 비난해온 졸라는 1898년 1월 ‘나는 고발한다’를 ‘로로르’에 게재했다. 본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발행인이자 편집인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제목을 바꿨다.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된 군인과 필적감정가 그리고 군사기관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고발하고 명예훼손죄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졸라는 많은 성원을 얻었지만 동시에 각종 위협에 시달렸고 실제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드레퓌스파와 반(反)드레퓌스 간의 진실 공방은 정권 획득 경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1898년 5월 의회선거에서 반유대, 반드레퓌스파가 승리했다. 졸라와 피카르가 곤욕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1902년 의회선거에서는 드레퓌스 지지를 매개로 한 사회당, 급진당, 공화 좌파 등 좌파연합이 승리했다. 선거 승리는 드레퓌스파에게 정치적 보상을 제공했고 동시에 드레퓌스 사건의 종결을 가져다 주었다.

1903년 드레퓌스는 자신에 대한 판결의 재심을 요청했다. 1906년 통합법정은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를 복권시켰다. 드레퓌스는 기병대 소령으로 복귀했고 군적 박탈식을 당했던 육군사관학교 광장에서 훈장 수여 열병식을 받았다. 이때 내무장관은 클레망소였고 그는 몇 달 후 총리가 됐다. 피카르도 군에 복귀하면서 중령에서 바로 준장으로 승진했고 10월에는 클레망소에 의해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졸라의 유해는 프랑스 위인들의 안식처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전략적 키워드는 마녀사냥, 사실왜곡, 폭로, 결집, 양극화 등이다. 먼저,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했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 유럽 곳곳에는 실업자 수와 유대인 수를 동일한 숫자로 표시한 선전 구호가 유행했다. 유대인 때문에 직장을 얻지 못한다고 선동하는 문구였다. 남들이 싫어하는 존재(마녀)가 있으면 이를 악용하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드레퓌스의 간첩조작극의 진실을 말한 에밀졸라

드레퓌스를 희생양으로 하는 마녀사냥이 성공하려면 잘못된 정보가 일단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실왜곡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수가 거짓을 강경하게 주장하면 진실을 말하던 소수도 다수의 거짓 의견을 따르게 됨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는 많다.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지어낼 수 있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은 다수결로 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대중은 간혹 다수결로 진위를 판단한다. 그래서 드레퓌스 사건 초기에는 프랑스 사람 대부분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의심치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애초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신했던 사람들은 다수가 아니었다. 비공개 군사재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모르거나 말없는 다수가 아니라, 목소리 큰 소수가 전체 의사를 대변했을 뿐이다. 따라서 드레퓌스 사건 초기의 여론은 목소리 큰 소수의 의견대로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믿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독일에 대한 당시 프랑스의 콤플렉스에서도 연유했다. 1870년 프로이센에 먼저 선전포고했지만 전쟁에서 지고 또 자신의 안방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 선포식을 바라만볼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로서는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프랑스는 독일의 첩보활동을 완전하게 처단하기 위해 독일과 전쟁까지 불사하려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프랑스 군사력이 독일에 대항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으며 독일과의 정면 승부 대신에 국내 마녀사냥을 선택했다. 15세기 잉글랜드의 지배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잔 다르크가 화형되는 것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방치했듯이 국내 정치가 우선이었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밝히려는 행동 역시 집단적으로 방해받았다.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공개하는 것 자체가 프랑스 안보에 위협된다고 반드레퓌스파는 주장했다. 마녀사냥에 박수 치지 않으면 마녀 편에 선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압력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군부를 개혁하자고 하면 적대국을 돕는 이적행위라는 반발이 나오게 마련이다. 정상적인 과정을 통한 진실 규명이 어렵다 보니 취한 선택은 ‘폭로’였다.


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

폭로가 폭로에만 그치지 않고 세의 규합으로 연결되면 그 파급효과는 크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계기로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즉,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세력의 결집이 시작된 것이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에 수천 명의 지지 서명이 뒤따랐고 1898년 11월 ‘로로르’에 실린 피카르 옹호 탄원서에도 1만 명 넘는 지지 서명이 있었다. 반드레퓌스파도 각종 서명과 글들로 결집했음은 물론이다.

조직화나 결집은 영향력을 극대화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한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마녀사냥도 쉽고 이에 대항하는 측의 동원도 쉽다. 쿠데타 자체가 조직적인 특정인들에 의해 추진되듯이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도 조직화될 수밖에 없다. 진실을 밝히려는 측뿐 아니라 은폐하려는 측 또한 선악의 대결에서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결집했다. 결집이 지속되면 진영이나 패거리로 불린다.


진영에 집착하다 보면 양극화가 심화된다. 극단적 대립은 집단화될 때 심화되고 집단화되지 않을 때 완화된다. 어떤 실험 연구에서 누가 찬반인지 알려주지 않고 좌석도 무작위로 했을 때 타협의 빈도가 높았고, 반면에 찬반으로 나누어 좌석을 배치하고 이를 미리 알려주었을 때 타협의 빈도는 현격히 떨어졌다. 계층 간 소통은 없고 대신에 계층 내 소통만 활성화돼 있을 때는 양극화되기가 쉽다. 양극화된 진영 간 소통은 논리보다 기 싸움이다. SNS에서의 다른 의견에 대해 “너 알바지”라는 대응이 그런 예다. 이런 인신공격이 합리적인 인식 공유를 가져올 리 만무하다. 결집에 결집으로 대응하는 것은 진화된 모습이지만 그런 양극화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냉전의 역사에서 보듯이 다극화되기도 하고 또 내부적 양극화로 대체되기도 한다.


왼쪽은 '나는 고발한다.' 프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내용

결집한다고 해서 승리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성공적인 결집이 되려면 공동이익뿐 아니라 진실이 담보돼야 한다. 다수 혹은 목소리 큰 소수를 통해 진실을 호도할 수 있더라도 영원히 그렇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마녀 편이라고 규정되더라도 진실 쪽이면 결집도 용이하고 또 정치적 이익도 얻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주 전개되는 진실 공방 게임과 마녀사냥의 당사자들이 숙지해야 할 전략적 측면이다.


독일과의 전후 관계에 반유대정서에서 유대인 혈통 장교에게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씌워 실형을 살게 한 뒤 수년에 걸쳐 밝혀진 다른 증거와 직접적 용의자를 눈가림하고 긴 세월을 거쳐 재심을 하게 되어 사면했으나 진범 용의자는 도주하여 천수를 누렸고, 오랫동안 국민 국론이 분열되어 백년 정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름 인권과 연대를 모토로 하던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며, 후대의 인권운동과 유대인 관련된 운동과 사건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발단이 터져나온 시기는 1894년으로, 당시 프랑스는 이전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의 통일을 이루려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이 가열차게 충돌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스트라스부르와 메스를 상실하고,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달성,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는 50억 프랑의 보상금을 요구하였기 때문.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불전쟁의 패배는 프랑스가 더이상 서유럽의 육군 최강국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보불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의 여론은 들끓어올랐다. 즉 패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는데, 프랑스 패배의 원인이 암묵적인 반역 행위에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에 다시 한번 쇼비니즘의 바람이 불어닥치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치열한 첩보전을 바탕으로 유럽에서의 실권을 장악하려 애썼기에 프랑스가 이러한 분위기로 흐르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특히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해온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신생 독일 제국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당시 프랑스인들의 인식도 여기에 한몫을 한 듯하다.


이곳 악령이 사는 섬에서 드레퓌스는 복역을 했다. 훗날 앙리 사리에르가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자서전이 빠삐용이다.

물론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하였고, 가장 먼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만큼 민족이나 인종을 넘어서는 포용력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3공화정 치하인 1890년대 프랑스 사회 내부에서는 아직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뚜렷했다. 특히 “라 리브르 파롤”과 같은 반유대주의 신문의 창간은 프랑스 국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인종차별적인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었고, 1892년 프랑스 정국을 발칵 뒤집은 파나마 스캔들에 유대계 자본이 관여한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 사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어 갔다.

더불어 독일이 통일된 후, 유럽 내 국가 간의 세력이 균형을 잡아감에 따라 이전 프랑스의 영광을 그리워하던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군대와 국가를 열망하였고,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 사상 등과 더불어 점점더 배타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패전으로 인한 혼란 + 국가제일주의 + 반유대주의 정서의 혼합 짬뽕이 결국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탄생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니콜라스 할라즈가 쓴《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36]이 1982년에 출간되면서부터였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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