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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0-12-24 01: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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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평양전쟁의 전범 수괴 도조 히데키의 죽음
  • 1948년 오늘-도쿄재판, 일본전범 7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 도조 히데키 죽었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살아남았다.

태평양전쟁의 주 전범 도조히데기

도조 히데기는 일본의 정치인, 군인, 전쟁 범죄자. 일본 제국의 40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일본군 육군 소속이며 최종계급은 대장이다.

대표적인 추축국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프로파간다를 포함한 매체에 일본군의 이미지가 '안경을 쓰고 콧수염 기른 빡빡이'로 정착된 것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워낙에 벌인 일이 거대하고 잔혹해서, 자살하려던 도조를 미군들은 살리고 치료해서 기어코 교수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청년기 시절의 도조


아버지(도조 히데노리) 때부터 군인 집안이었고 도쿄 출생으로 군인 아버지를 따라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일 유학 시절 야마가타 아리토모 전 총리에게 초슈벌만 등용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면전에서 따지는 짓을 했다가 쵸슈벌에게 찍혔고,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으나 상관의 명령이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거부하여 예편되었다. 이때 야마가타가 중장으로 승진시켜 3일간 별 세개를 달게 한 다음에 예편시키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그때가 도조 히데키 임관 직후였다.


도조히데키 처형 장면

육군에서 출세하려면 사관학교 졸업후, 일종의 고급 지휘관 과정인 육군대학을 들어가야 하는데, 도조는 3수 끝에 겨우 들어갔다. 육군대학을 다녔는데 아버지는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도조 히데키의 성적은 매우 좋지 못했다. 특히 유년시대엔 싸움대장이였으며 겁도 없이 상급생 20명에게 덤비고 뒤지게 얻어맞은 다음에야 싸움을 접고 공부에 전념했다. 육군대학 시험을 앞두고서 합격에 필요한 학습 시간을 계산해서 하루에 공부 시간을 정하고 쪼개서 시험을 준비했다. 근데 3번이나 떨어진 후 간신히 졸업했다.


그렇게 어찌저찌 졸업한 뒤 관동군 헌병사령관, 참모장, 일본 육군 차관을 역임했다. 다만 육대 출신 엘리트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직책을 전전했는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초슈 쪽 라인에게 찍혀서 한직을 돌았다. 실제로 육대 출신이면 갈 까닭이 없는 한직인 헌병사령관도 했다. 일본군 헌병이 큰 권력을 행사한 조직이지만, 그와 별개로 사령관은 별 것 없는 자리였고, 사실상 이 자리를 주면 좋은 말할 때 나가라는 뜻이었다.


도조 히데키 죽었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살아남았다.

물론 도조는 때를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그냥 역임. 이후에는 당시 군부의 최고 유력 파벌이였던 통제파의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는데, 통제파의 수장이였던 나가타 데쓰잔이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암살당하자 그 뒤를 이어 도조가 통제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가 관동군에 헌병사령관으로 있었을 때 그 악명 높은 731 부대가 생체실험도 했고 프로파간다라는 말도 있지만 10만의 반일 분자를 재직시 1만으로 줄였다는 평도 얻을 정도였으며, 실제로 만주에 부임했을 때 딸들에게 "몸값도 없고 굴복할 생각도 없으니 비적이 납치해도 구하지 않겠다"라 공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조 히데키에게 면도기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 이유는 도조가 일을 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36년에는 대립 관계였던 황도파가 2.26 사건을 일으키자 도조가 이끄는 통제파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황도파의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결국 황도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통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 되었다. 이후로 내각은 각료의 인선이나 정책에 대해서까지 군부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고, 군부는 내각을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7]를 부활시키고 군의 정치 개입을 용인하는 등 '국방 국가' 구상을 정강으로 내세워 군부의 권력을 끝없이 강화시켰다. 또한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던 나치 독일과 독·일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군사비 약 14억엔을 포함한 방대한 예산을 편성하는 등 정치체제의 군국주의화를 가속화시켜 나갔다.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으로 재직하며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2개 여단을 무단으로 파견하여 사태 확대를 꾀했다. 1937년 베이핑-톈진 전투로 베이핑이 함락되자 도조 병단이라 불리는 차하얼 병단을 조직하여 베이핑 탈환전에 투입, 탕언보가 지휘하는 13군을 격파하고 차하얼성과 수원성을 장악하였다. 1940년에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된 후에는 외무 대신과 협력하여 일본 제국이 추축국에 가입하는 일에도 한몫 했다. 그 후에는 태평양 전쟁을 기획하고는 그 기획안을 육군 수뇌부에게 공개하여 열렬한 지지를 얻고, 1941년 10월에는 대미 개전을 반대하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압박하다가 결국 고노에 내각을 무너뜨렸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을 주둔시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슬슬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끝나지 않고 지속되자, 도조는 "이 상황에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무리하게 전선을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며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중일전쟁이 마무리 되고 어느정도 전후 수습이 된 후'로 미루겠다는 뜻을 밝힌다. 하지만 이미 도조가 공개한 태평양 전쟁 기획안에 취향저격 당한 육군 강경파는 당장 전쟁을 시작하자며 난리를 쳤고, 우습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인 도조가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40대 총리 취임 


그러던 와중에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심각하게 폭주하는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은 황실의 큰어른이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전하 정도밖에 없다."며 나루히코를 새로운 총리 후보로 추천했고, 도조 역시 당장은 대미 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 된 만큼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최측근이였던 기도 고이치는 "지금 육군은 황실의 큰 어른이든 뭐든 간에 자신들 뜻에 따라주지 않으면 무시해버리고도 남을 놈들이다. 지금 당장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군부의 수장인 도조 히데키뿐이다."라며 도조를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이 말을 들은 쇼와 덴노는 고민 끝에 "이른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이라며 도조를 총리로 임명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였던 도조는 미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내각의 총리가 되었고, 일단은 교섭을 통해 미국과의 갈등을 해소해보려 노력했으나 미일 양국 간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도조의 이러한 방침 변경에 큰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낀 육군은 그를 따르기는 커녕 도조 내각마저 압박하며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도조는 결국 쇼와 덴노와 기도 고이치를 찾아가서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이 상황에서 계속 전쟁을 피하려다가는 여론이 분개하고 육군 강경파가 폭발하여 쿠데타가 일어나 황국은 결국 대규모 내전 상태가 되어 자멸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히데키의 손녀인 도조 유코

즉, 도조는 육군 강경파의 뜻대로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며 덴노를 거듭 설득했고, 더이상 육군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쇼와 덴노도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도조는 진주만 공습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1억의 일본인들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느니라.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게 선전포고 중


육군 강경파의 폭주 때문에 사실상 억지로 일으킨 전쟁이였으나, 놀랍게도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연속으로 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도조도 "내가 미군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괜한 걱정을 했었다."며 모든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실망감을 느끼던 육군 역시 다시 도조를 적극 지지하며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한편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수많은 관직을 집어먹으며 더욱 권력을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부, 상공, 군수대신까지 겸임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색이 점점 짙어져가며 도조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정계는 물론이고 해군 측에서도 도조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전황이 막장으로 치닫자 결국엔 통수부, 즉 육군의 참모총장과 해군의 군령부장이 ‘전시 통수권 독립’을 명목으로 중요한 군사 정보를 도조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도조는 1944년 2월 21일 ‘국무와 통수의 일원화’를 명목으로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본인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 무렵의 도조 히데키는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국방부 장관 겸 교육부 장관 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겸 행정안전부 장관 겸 기획재정부 장관 겸 육군참모총장 겸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인 셈. 쉽게 말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먹었다는 얘기다.


실질적으로는 차관이 장관직을 하니 이렇게 겸직해도 일단 겉모양은 그럭저럭 굴러갔다지만, 대부분의 관직은 1년도 안 가서 물러났다.


이렇게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행정수반인 총리대신, 육군의 수장인 육군대신, 육군 군령의 장인 참모총장 3직을 장악해버린 도조는 정계와 해군으로부터 "육군이 완전히 도조의 사병 집단이 되어버렸다", "천황의 대권마저 대놓고 침해하는, 그야말로 '도조 막부'가 따로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 헌법과 정치/군사 제도의 구조상 전시 내각을 총리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면 주요 국무대신직을 총리가 얻어야만 했다. 국무대신이 단 1명이라도 정책에 딱지를 놓고 파업하면 각내 불일치로 내각 전체가 깡그리 물러나야 했으니. 당시 일본의 체제에서는 총리의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조는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상술했듯이 도조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군부의 수장이였다. 그리고 군부는 당시 일본에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 집단이였기 때문에 군부의 최고 권력자는 곧 일본의 최고 권력자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군부는 내각의 통제를 아예 거부하며 오히려 틈틈이 무력으로 내각을 압박하고 있었고, 통수권자인 덴노에게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 또한 덴노가 군부의 뜻대로 나라가 돌아가게끔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을 행사해주는 대가로 군부는 덴노를 무력으로 압박하지 않고 충성한다는 암묵의 룰이였기 때문에 결국 덴노도 군부의 눈치를 보며 행동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군부와 내각을 모두 점령한 도조는 이미 절대적인 권력자였고, 심지어는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하며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도조가 전쟁을 이끌면서 점점 그의 매우 실망스러운 군사적 능력이 끝없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여기에 그의 답 없는 인재 등용 능력까지 더해져서 온갖 무능한 바보들과 미치광이들이 군에서 높은 자리를 해먹는 바람에 일본군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희대의 막장 집단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일본군을 대전말 막장 집단으로 만든 데는 도조 히데키도 단단히 한 몫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41년 1월 8일 육군 대신이었던 도조가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군기가 흐트러지고 있다며 발령한 훈유(訓諭)인 '전진훈'. 전진훈에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고 항복 금지를 명문화하여 쐐기를 박아놓는 바람에, 태평양 전쟁에서 무수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옥쇄(개죽음) 상황에 몰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태평양 전쟁이 그야말로 개막장으로 치닫자 일본 정계에서도 도조 히데키에게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다. 언론 통제로 민간과 군에서는 나라 돌아가는 자세한 꼴을 몰라 대놓고 비난은 못했는데, 일본의 정보 통제가 워낙 철저해서 정부의 고위 관계자조차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몇 달이 지나서야 알 정도였다. 심지어 도조 자신도 처음엔 제대로 몰랐다. 해군 군령부에서 제대로 정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조는 해군의 보고를 그대로 천황에게 올렸는데 천황이 자신과 다른 수치로 알고 있었던 것을 듣고는 그제서야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알았을 정도였다.


사실 통수권자인 쇼와 덴노 말고는 전체적인 전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인물이 없었다. 비록 도조가 군부의 수장이었다고는 하나 엄연히 육군 출신이였기 때문에 해군 측에서는 당연히 도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도조에게 전시 상황을 보고할 때에도 중요한 내용은 빠뜨리거나 아예 왜곡해서 보고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반대로 육군의 전시 상황에 관해서는 도조가 쇼와보다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 당시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상 다나카 장군이 선박 지원을 요청[9]했지만 도조가 거부하자 욕설을 퍼부어 경질되기도 했다.


무타구치 렌야의 희대의 팀킬 만행인 임팔 작전을 하는 것에도 이 인간이 기여했다. 다만 이 부분은 결재받을 때 우물쭈물 준비도 안한 걸 그냥 넘어간 아랫사람 책임도 있다. 거꾸로 도조는 임팔 작전시 위험사항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다만 아주 뻘짓만 한 건 아닌지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항공기들에 방탄장갑과 연료 자동 봉입장치를 장착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갈수록 여러 삽질과 문제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도조 히데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도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장성은 요직에서 해임시켜 전사할 확률이 높은 최전선으로 보내거나 예비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언론인, 지식인, 관료 등은 나이에 상관없이 ‘징벌소집’하여 이등병으로 전선으로 보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정적이나 비판 세력에게 강권적인 통치를 자행한 것이다. 특히 헌병사령관이었던 경험을 살려 본래 군인 · 군속에 대한 군사경찰을 주 임무로 하는 헌병을 자의적으로 국회의원 등 정치가를 비롯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도 광범위하게 활용하며 공포정치, 이른바 ‘헌병정치’를 실시했다.


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히틀러처럼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만큼은 우수한 것처럼 보인다. 일단 주류 인맥에서 찍혀서 오늘 내일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군부의 수장이자 독재자가 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총리직 사임


이미 전황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던 1944년 7월 일본 본토 폭격을 할 수 있게 된 사이판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스스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것도 도조가 만주국 이래로의 맹우인 기시 노부스케를 장관직에서 해임하려고 시도했으나 기시가 "나 자르려면 네놈도 절대 국방선 붕괴의 책임을 지고 같이 물러나라!" 면서 강경하게 고집을 피운 덕분에 같이 사퇴했다. 여담으로 이때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어차피 도조는 전후에 전범으로 사형당해야 하는데, 불쌍하게 도조의 후임을 맡아서 죽을 사람을 늘리지 말고 도조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 총리를 맡게 하던가, 아니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족 내각을 수립하고 미국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연히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도조의 어마어마한 권력은 건재했으며, 사퇴 직후에도 고이소 구니아키를 대놓고 꼭두각시 총리로 내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게다가 고이소가 원로 중신들에게 탄핵당한 후에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육군 대장 하타 슌로쿠를 차기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고는 스즈키 간타로를 추천하는 해군과 문관들을 "육군이 아닌 사람이 총리가 되어버리면 국토 방위의 주력군인 육군이 내각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곤란해질 것"이라며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도조의 위험성을 알아버린 쇼와 덴노는 스즈키를 총리로 임명했고, 도조와 육군은 정말로 내각의 지시를 거부한 채 따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에 쇼와 덴노, 스즈키 총리, 그리고 중신 대부분이 항복을 주장한 끝에 결국 태평양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일본 시민들은 뻔뻔하게 살아있는 도조 히데키에게 "너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 할복해서 국민에게 사죄하라", "빨리 자결하라"는 수만 장의 편지가 집으로 왔지만 무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시민들로부터 돌로 맞아서 시체가 거꾸로 매달리는 사진이 보도됐을 때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살 미수 사건과 최후


패전 후 집안에 칩거하다가 9월 11일 미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에 저항하며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미군 병원에 옮겨져 미 육군 의료진의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심지어 혈액형이 동일한 미 육군 병사 헌혈을 해 줘서 살아 남았다. 자살 미수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전진훈도 못 따른다고 일본인들의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받았다.용태가 회복된 후 수용소로 옮겨졌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 범죄자로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직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국가신토에서 불교로 개종 한 이후에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 부처님 곁)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도조는 사형 선고를 받자마자 최후까지 군인답게 죽겠다며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을 받기를 희망했으나 연합군은 "너 같은 범죄자에게는 교수형이 더 어울린다"며 거절하고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화장되어 7명의 유골은 태평양 먼 바다에 버려졌으나, 화장지 등 남은 유골의 일부를 일본 한복판에 안장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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