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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0-12-30 23: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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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33년전 오늘, 897년 세상과의 작별을 고한 진성여왕 탕녀인가 성녀인가.
  •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

극중의 진성여왕

진성여왕(眞聖女王, ?~897년 12월 31일(음력 12월 4일), 재위: 887년 – 897년 음력 6월 1일)은 신라의 제51대 국왕이자 한반도 역사상 마지막 여왕으로, 선덕여왕, 진덕여왕과 함께 신라 3대 여왕, 혹은 한국사 3대 여왕으로 손꼽힌다. 또한 통일신라의 마지막 국왕이자 신라 국왕 중 유일하게 생전 퇴위한 국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동생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그의 부모인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했고 진성여왕이 그들 사이에서 3번째 자식인 점 그리고 문의왕후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860년대 중후반 정도로 추정된다.

887년부터 89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887년부터 888년까지 이벌찬(각간) 김위홍(金魏弘)이 대리청정을 맡았고 김위홍(金魏弘)이 서거한 888년부터 897년 음력 6월 1일 조카 김요(효공왕)에게 선위할 때까지 친정하였고 퇴위한지 6개월 후인 897년 12월 31일에 붕어하였다.



최치원이 쓴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 그리고 낭혜화상탑비 등에 의하면 성군(聖君)이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막내아들로 양정을 두었다고 나와있으나 활동시기 문제 때문에 김위홍이 부호부인에서 얻은 아들로 추정된다.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둘째 오라버니인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895년 원봉성(元鳳省)을 신설하는 등 신라 국정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7년 음력 6월 1일(양력 7월 4일),[2]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인 요를 왕위계승자(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897년 음력 

12월 4일(양력 12월 31일)에 승하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진성여왕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이 위홍이 죽은 뒤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맡기면서 국정이 문란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거리에 국정을 비판하는 글이 붙을 정도로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유모인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인 위홍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국정을 어지럽혀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적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라의 음란한 암군으로, “진성여왕”을 흔히 지목한다. 그러나 헤공왕 때부터 시작하여, “김헌창의 난”을 거치며, 국운이 쇠한 신라의 멸망을, 무조건 “진성여왕의 음란의 결과”로 몰고가는 것은, 좀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 본다. 사실, “진성여왕”은 오빠인 “정강왕”이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에 들었는데, 죽기 전에 "여동생이 총명하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전례도 있으니, 잘 할 것이다."라며 진성여왕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의 외모는, "골격이 흡사 장부와 같다"고 적혀 있다. 즉, 어지간한 남성들 못지않게 체격이 좋은 여성이었던 듯하다.


진성여왕기에 대하여


그녀는 남자와 같이 기골이 장대한 것으로, 평을 받았다. 

진성여왕은 비록, 총명하고, 남성 못지않은 기골이 장대하는 평을 받으며, 즉위했음에도 한반도 대부분을 다스리던, 통일신라의 실질적인 종말을 고한 왕이다.

왜냐하면, 진성여왕의 재위기에, 신라왕조가 결정적으로 후삼국으로 분열하여,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까지 한국사의 대표적인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막장, 최악의 군주였는가?


삼촌인 각간위홍과는 간통인지, 아니면 각간위홍이 정식 남편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사실, 진성여왕은 음란한 사생활로 유명한데,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삼촌인 각간위홍과의 근친상간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몇 년만에,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과 부호부인의 남편 위홍 등이 실권을 잡자, 신라조정이 혼란에 빠졌다 적고 있다.


진성여왕이 자신의 내연남인 삼촌 위홍과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건축했다는 용당암

이 “위홍”이란 사람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삼촌이다. 즉 왕족이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 겸 자신의 삼촌이 되는 “위홍”과 관계를 맺게된다.

삼국사기에는 "임금이 평소 각간 위홍과 간통했는데, 그가 죽자 “위홍”을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위홍이 죽은 후, 진성여왕이 미소년 두세 명을 궁에 끌어들이니, 왕실이 음탕, 문란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교적 시각이 아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위홍 대각간(大角干)은 왕의 남편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즉, 위홍을 간통한 상대가 아닌 진성여왕의 정식남편으로 보았기에, 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근친혼이 “신라 왕실”의 일반적인 풍습이라는 점을 볼 때 반드시, 음란이란 부분으로 진성여왕을 재단하기에는 당시 상황에선 다소 부당한 평가일 수도 있다. 



최치원의 진성여왕에 대한 평가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린 최치원 


진성여왕 대에 최치원이 작성한 “성광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朗慧和尙 白月光塔碑)”에 의하면

"(왕의) 은혜가 바다 같이 넘쳤다"라며 성군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이 비문은 "진성여왕은 과연 암군인가?"라는 의견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당연히 당대의 왕을 대놓고 폭군으로 묘사할 순 없었을 것이므로, 저 기록만으로 최치원이 진심으로 진성여왕을 성군이었다고 생각할 수 만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유교적 사고로 쓰여진 “삼국사기”만을 가지고, 무조건 “진성여왕”을 음탕한 암군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진성여왕 때의 사회상황


사실 진성여왕은, 여성으로서 왕이 되었기에, 신라의 멸망의 책임을 거의 혼자 뒤집어 썼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진성여왕 당시에는 상주에선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고,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으며, 사방에 초적과 호족들이 들끓는 등, 정말로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진성여왕”의 실정이 결과라고는 볼 수 만은 없다.


오히려 혜공왕 이후, 진골귀족의 왕권쟁탈전과 이로 인한 문제가, 진성여왕 시대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당시 진성여왕이 신라의 상황을 수습, 재정비하지 못했던 점과 그녀가 수습할 만한 역량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미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 이미 신라는 혜공왕 때를 시발점으로 해서 국력도 쇠하고 민심도 흉흉해 서서히 무너지던 나라였다. 888년에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방을 써 몰래 길거리에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후삼국을 여는 진성여왕 시기의 혼란(드라마 태조 왕건 중)


진성여왕 3년(서기 889년) 이미,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물을 바치지 않아 재정이 궁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기도 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시기는 신라구(신라해적)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현춘이라는 인물은 배 100여척, 병력 2,500여명을 이끌고 규슈 지역을 약탈하다 사로잡히기도 했다. 894년에는, 최치원을 당나라에 보내려다가 도적이 많아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해적이 많아 황해를 건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a)진성여왕 5년(서기 891년) 10월 북원(北原)의 군벌 양길이 궁예에게 1백여 명의 기병으로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b)진성여왕 6년(서기 892년) 견훤이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하고 왕을 자칭하니,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그에게 소속되어 버렸다. c)이후 진성여왕 8년(서기 894년) 10월에는 궁예가 북원(원주)에서 하슬라(강릉)라로 침범하니, 그 무리가 600여명에 달하고, 궁예는 스스로 장군이라 하였다는 기록과 그리고 진성여왕 9년(서기 895년) 8월에는, 궁예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후삼국시대의 기틀은 진성여왕 시대에 거의 다 잡힌 것이다.


적고적이라는 도적떼가 노략질을 하다


896년에는 적고적이라는 붉은 바지로 의상을 통일한 도적단이 나라 서남쪽에서 나타나 서라벌 바로 옆 모량리까지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최치원과 진성여왕/  최치원과 관련 유적 


894년 2월에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자, 진성여왕은 그 안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최치원의 제안은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 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못한다.


6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이 골자라서, 골품제 중심의 신라의 정치 체제로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신라는 돌이킬수 없는 길을 걷게된다.


결국 진성여왕은 재위 9년(서기 895년) 10월에, 큰오빠 헌강왕의 서자인 요(嶢)(뒷날의 효공왕)를 태자로 봉했고, 11년(서기 897년) 6월에 왕위를 넘겨주고 북쪽 궁궐(北宮)으로 거처를 옮긴 뒤 반 년 동안 태상황으로 있다가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살~33살 사이로 추정되는데,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러한 사실과 당시의 당대 혼란한 정황으로 봐서 자연스러운 양위가 아니라 반정이나 그에 준하는 원인 때문이란 설도 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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