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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 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01 00: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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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 1월 1일 경남 부산시에서 직할시로 승격
  • 1963년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하며 경남도에서 떨어져 나왔다.
  • 부산시 초대시장은 육군준장 출신의 김현옥이었다.

1963년 1월1, 부산직할시로 승격되던 때의 기념행사

직할시는 중앙 정부에서 직접 관할하는 도시라는 뜻으로, 도시행정의 특수성을 대처하기 위해 만든 행정구역의 호칭. 현재 북한, 중국, 대만, 베트남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과 동시에 광역시로 명칭을 개정하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직접 관할한다는 뜻은 (대한민국 기준으로) 지자체장을 중앙에서 임명할 때 각각 내무부→도지사→시장/군수 순서로 하지 않고 내무부→시장이라는 형태로 임명한다는 소리이다. 이러한 이유로 직할시가 되면 그 이전까지 소속되던 행정구역에서 분리되어 독립시가 된다.


1963년 경상남도에 속해있던 부산시가 경상남도 관할에서 중앙정부 직할로 승격된 것에서 시작했다.

이는 수도라는 특수성이 감안되어 1947년 경기도 경성부가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특별시로 승격한 것을 보고(사실 서울은 예로부터 한성부라는 독립 기관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의 수도를 경기도 치하로 격하시키며 이름을 경성으로 바꿈), 


부산 쪽에서 1949년부터 부산의 두 번째 특별시 승격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서울지역 국회의원들은 서울 행정구역의 희소성이 약화되는 것 때문에 이를 반대했고 도전과 반대가 반복되며 표류하다 결국 1962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부산시 정부직할에 관한법률을 통과시키면서, 1963년 1월 1일부로 경상남도 부산시는 특별시에 준하여 도와 비슷한 지위를 가지는 중앙정부 직할 부산시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정부 직할이 되었지만 당시 명칭은 부산직할시가 아니라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경상남도'만 빠진 부산시였다. 시장 직함명도 부산직할시장이 아니라 부산시장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1963년부터 1981년까지의 이 과도기 직할시 시절을 나타내고자 부산시 앞에 정부 직할을 괄호 병기하여 '(정부 직할) 부산시'로 표기한다.


부산직할시 초대시장(훗날 서울시장과 내무부장관을 역임: 가수 정훈희의 시부)

그러나 부산시 내에서는 부산직할시 명칭도 비공식적으로는 쓰였다는 것을 근거로 괄호 병기 대신 부산직할시 표기를 1963년으로 소급 적용하여 쓰고 있다. 

1963년 직할시 승격 기념식 현수막에도 '부산직할시 승격'으로 적혀 있었으며 부산교통공사의 전신인 부산직할시 지하철건설본부 출범도 부산직할시 개칭 3개월 전에 이루어졌다. 

그 외 옛 신문 기사를 살펴보아도 부산직할시 명칭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공식적으로 직할시라는 명칭은 1981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와 경기도 인천시가 각각 대구직할시와 인천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적용되기 시작했다(대구직할시 및 인천직할시 설치에관한법률). (정부 직할)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공식 변경된 것은 이보다 3개월 전인 4월 4일이다. 지방자치법상의 직할시 승격은 1988년에 광역자치단체를 도와 서울시에 직할시를 추가하면서 성립한 것이 되지만 실질적으로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무력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1981년에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1986년 11월 1일에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던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에서 분리독립하였고(광주직할시 및 송정시 설치에 관한 법률), 1989년 1월 1일에는 충청남도에 속해 있던 대전시가 대덕군을 흡수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어 충청남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대전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 이후 1995년 직할시를 광역시로 개칭하게 됨에 따라 이들 지역은 광역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지방자치법 부칙(제4789호) 제1조, 제5조). 1995년 지방자치제 본격 부활을 앞두고 '직할시'라는 명칭이 지방자치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어서 이렇게 명칭이 변경되었다.


부산의 야경

경상남도 울산시는 1995년 울산군(1991년 이전 울주군)과 통합되었다가[2], 1997년 광역시로 승격되어 경상남도에서 분리독립하였다(울산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 때문에 2016년 현재 존재하는 광역시 중 울산만이 유일하게 직할시를 거친 적이 없는 광역시다.


2012년 7월 1일에는 충청남도 연기군이 세종특별자치시로 승격되어 충청남도에서 분리독립함으로서 현재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 등 총 17개 광역자치단체로 구성하고 있다.


경남 부산이 1963년 1월1일에 중앙정부 직할의 부산 직할시로 승격한 전후로 하여 

부산시의 특별 시제에 관한 법률안은 여러 차례 걸쳐 제출되었지만, 도·시세의 약화를 우려하는 경상남도와 서울시 등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1962년 11월 21일 「부산시 정부 직할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고,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어 부산은 중앙 정부의 직할시가 되었다. 직할시로의 승격이 이루어지면서 행정 조직과 시역(市域)이 대규모로 확장되었다. 


1963년 2실 8국 31과이던 행정 조직은 1972년 2실 9국 1본부 5담당관 40과로 팽창하였으며, 공무원 정원도 1,500여 명에서 4,2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제3차 확장이 이루어진 때의 시역은 동래군의 구포읍·사상면·북면과 기장군의 송정리를 편입하여 면적이 360.25㎢로 늘어났고, 1995년에 연제구, 수영구, 사상구, 기장군이 설치·편입되어 시·도 간 경계 조정이 함께 이루어져 광역시로 재편되었다.


부산유래


부산광역시 야경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2년(태종 2) 1월 28일 『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며,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 『성종실록』 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南悌)가 그린「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 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보면,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래부지(1740)』 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일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 양진(兩鎭)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 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1481)』 편찬 이전에는 富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釜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 에 실려 있는「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에 임하여"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釜山鎭城)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鄭公壇)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詩文)에 나오는 산은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변박이 그린 「왜관도(倭館圖)」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 「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 「가모령」이라고 한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枾, 嶺)은 우리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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