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사시적(斜視的)으로만 보는 정부요인의 국가사관에 대한 견해
  • 편집국
  • 등록 2021-01-03 23:21:26

기사수정
  • 김원웅 광복회장, 또 “안익태는 친일·친나치...새로운 國歌 추진”


김원웅 광복회장이 1일 “표절과 친일·친나치 행위로 얼룩진 애국가 작곡가(안익태)에 대한 역사적 심판과 함께, 새로운 국가(國歌) 제정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광복회가 조성해 나가겠다”고 했다. 김 회장은 이날 신년사에서 “지난 75년간 우리사회의 갈등과 분열은 친일 미청산에 기인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회장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 때도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관련 자료를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다”며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안익태 선생의 유족은 김 회장을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고소했다. 김 회장은 이날 신년사에서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는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증식시켜온 세력이 점령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은 진보·보수가 아니라 친일반민족 세력이 부당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저항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세대가 친일 청산에 실패하면, 대한민국은 애국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다음 세대에게 절망을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 회장은 “은닉된 친일 재산을 찾아내 국고 환수하는 노력을 통해 광복회의 사회적 위상을 한층 높여나갈 것”이라며 “무엇보다 광복회원 복지 향상을 위한 광복회 수익사업의 활성화와 시도지자체의 조례 제정, 국회법안 개정에 힘쓰겠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김원웅이가 주절대는 발언들이 진실에 기반한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입장을 밝혀야 한다.


우파가 좌파를 '빨갱이'로, 좌파가 우파를 '토착왜구'로 단죄하는 세태가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은 결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빨갱이 종북 몰이뿐만 아니라 토착왜구 친일몰이 정치와 분명한 단절을 선언해야 한다. 


 김원웅이 "안익태는 친일, 친나치"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그럼 애국가를 폐지하자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해야 하고, 반일 친북, 반미 친문의 김원웅 회장은 파직(罷職)돼야 한다. 

또 김원웅이 "서울현충원에서 가장 명당이라는 곳에,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자가 묻혀 있다"며 전직 대통령 등의 파묘(破墓·무덤을 파냄)를 거론한 데 대해서도  정치적 보복이자 역사 부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둔다 

따라서 민주당은 애국가를 공식적으로 폐기할 의사가 있는지, 국립묘지에서 박정희도 파묘할 것인지 공식적으로 답해야 한다. 


사실 안익태선생이 친일파라는 논란의 시작은 독일 유학생 송병욱씨(훔볼트대 음악학과 석사과정)가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3월호에 기고한 논문이었다. 

독일연방 문서보관서 산하 필름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필름을 살펴본 송씨는 논문에서 안익태가 1942년 베를린에서 만주국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만주국’을 작곡·지휘했는데, 이중 일부 선율이 ‘한국환상곡’의 선율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필름에서 안익태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창설을 축하하는 곡을 작곡하고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는 음악당에서 이를 직접 지휘했다.


송씨는 이어 객석 4월호에서 안익태가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주고받은 편지를 근거로 친일의혹을 제기했다.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는 1942년 3월과 1944년 2월 23일에 작성된 것으로, 주소지는 일본 외교관의 사저였다고 한다. 송씨는 이를 근거로 안익태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항일’ 한국환상곡 세계 돌며 연주


안익태기념재단측은 이렇게 반박한다. “한국환상곡과 만주국의 일부 선율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 작곡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9곡 중에서 비슷한 부분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 게다가 안익태 선생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다. 일본영사관의 주소는 단지 주소지로 사용했을 뿐 거주지는 아니었다.” 고 말한다. 


필름이라는 ‘물리적인 증거’가 있는 1942년 만주국 작곡·지휘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 사무국장은 “만주국을 연주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안 선생의 예술활동일뿐 정치활동은 아니다”라며 “안익태 선생이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자료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1938년까지 안익태는 항일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인정된다. 문제는 이후 7년 가량인데, 이에 대해 박 사무국장은 안익태가 절대 친일파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던 사람이 어떻게 친일파가 되느냐는 것이다. 박 사무국장은 예를 들었다. 1942년쯤 안익태는 이탈리아에서 한국환상곡 공연을 준비하다가 일본의 항의로 쫓겨난 적이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환상곡이 항일의식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지구상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일본화됐으니 괜히 남의 나라 내분을 조장하지 말라는 항의각서를 보냈다.


작곡가 안익태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하고 있다. 이 동영상으로 안익태가 ‘만주국’ 을 작곡·지휘한 사실이 알려졌다. 

작곡가 안익태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하고 있다. 이 동영상으로 안익태가 ‘만주국’ 을 작곡·지휘한 사실이 알려졌다.


한국환상곡은 ‘Korea’라는 이름을 가는 곳마다 알리는 역할을 했다. 애국가 선율이 포함된 한국환상곡은 일본 입장에서 보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한국환상곡은 단군의 개국을 알리는 서정적인 선율로 시작,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기도 하나 항쟁 끝에 광복을 맞이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후에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인 비극 부분이 포함됐다. 한국환상곡 후반부의 합창부분에는 애국가의 선율이 흐르고 있는데, 안익태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전정임 교수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안익태 선생의 1953년, 1954년판 한국환상곡 악보 첫 번째 장에는 안익태 선생의 애국애를 담은 시와 함께 한국환상곡을 연주한 장소가 적혀 있습니다. 참고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남긴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에 적힌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메모에는 연도별로 적혀 있다. 1939년 이탈리아 로마와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소피아, 1940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1941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독일 베를린·하노버, 스위스 취리히, 194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1943년 독일 베를린·함부르크, 스페인 마드리드, 이탈리아 로마 등 전 유럽에 걸쳐 있다. 친일음악인으로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가는 곳마다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며 일본에 합병된 한국의 고난을 알리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래에서 위로’ 채택된 애국가


안익태기념재단은 이와 같은 자료에 근거, 인간 안익태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계획이다.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안익태 선생이 친일행위를 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이 사실을 알리면 된다는 것이다. 스페인에서 가족으로부터 유품을 받아와 정리작업을 하고 있는 안익태기념재단은 전 세계에 퍼진 자료를 모을 계획이다. 올해 말 열릴 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에 주한 외국공관원을 대거 초청하는 것도 이들에게 안익태 선생을 알리고 이들 정부로부터 자료수집에 적극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친일 논란과는 별개로 정통성을 확보한 애국가를 교체하는 것은 민족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4월 7일 민간학술단체 국가상징연구회가 개최한 ‘애국가의 역사성과 정통성에 관한 토론회’에서 김연갑 연구위원은 “친일파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고 독립선언문을 없애야 하느냐”며 “만약 안익태 선생이 친일을 했다면 그렇다고 인정하면 될 뿐 그것이 애국가 교체로까지 번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애국가는 독립을 바라는 민중으로부터 선택돼 국가가 된 노래이기 때문에 역사성과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애국가는 1890년대 독립신문의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에서 시작돼 다양한 가사와 곡조로 불리다 1907년 윤치호가 작사한 가사로 통일되기 시작했고, 1935년 미국에서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가 더해져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애국가는 1941년 임시정부 국가로 채택됐는데, 이는 아래로부터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69호에는 “북미대한인회 중앙위가 안익태 작곡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그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한다’고 돼 있다. 


이후 임시정부는 1941년 광복군 성립식에서 애국가를 연주, 국가로 채택했다. ‘아래에서 위로’는 해방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8월 16일 시민들은 신문사와 학교 게시판에 게시된 가사를 보며 합창하는 등 애국가를 널리 이용하기 시작했고, 1948년 제헌국회는 애국가를 국가로 채택했다. 김 연구위원은 “프랑스 국가에 ‘적의 목을 따 그 피를 뿌려라’는 부분이 있지만 역사성 때문에 여전히 국가로 불리고 있다”며 “민족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애국가는 더 이상 안익태 선생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익태 선생의 친일논란과 애국가 교체는 따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또 다른 한컨에선 김원웅회장 부모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 내용은, 김원웅 광복회장 부모의 독립운동 행적에 의혹을 제기하며 "진위를 조사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광복회 내부에서 올라와 있는 논란을 말하는 것이다. 김 회장 측은 "이미 조사를 거친 사안"이라며 반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회 회원과 독립운동가 유족 등 100여 명이 참여한 '광복회개혁모임'은 지난 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김원웅 광복회장 부(김근수)·모(전월선) 가짜 독립운동가 의혹 진상조사 청원"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청원에는 일주일 만인 13일 오후 4시 기준 9700여 명이 동의했다.

개혁모임은 청원글에서 "광복군으로 서훈받으려면 광복군에 참여한 명확한 근거자료나 기록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근거로 독립유공자 공적심의위원회의 심의를 통과되어야 한다"며 "그러나 김근수·전월순 부부의 독립운동 관련 공적을 분석해보니 의열단에도, 조선의용대에도, 광복군에도, 그 기록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광복군 관련 자료집에 김원웅 부모 기록 전무"


광복회개혁모임은 이어 "독립기념관이 그동안 발간한 수많은 광복군 관련 자료집과 논문에도 김근수·전월순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며 "심지어 자신이 활동했다는 광복군 1지대 등 그 어떤 곳에도 두 사람 성명·사진 등 활동 기록이 없으며, 광복군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역사학자 단국대 한시준 명예교수의 <한국광복군>이라는 유명한 연구책자에도 김근수·전월순에 대한 자료는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의 부친 김근수(1912~1992) 씨가 처음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1963년 대통령표창을 받으면서다. 이후 김씨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받았다. 부인 전월순(1923~2009) 씨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들이 본격 독립유공자로 등재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광복군 생존자 확인서'(인우보증서)를 통해서다. 당시 인우보증을 섰던 관련자들은 현재 생존해 있지 않다.


"부친 의열단에 입단? 명단에 없어"


개혁모임은 (김 회장의 부친) 김씨가 자신의 공적서에서 '1931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비서관 직책을 거쳐 1935년 5월 난징에서 조선의열단에 입단했다'고 언급한 것을 두고 "당시 임정에는 경무국도 없었고 경무국 비서관이라는 직책도 아예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어 "김근수는 자신이 의열단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1919년 출범한 의열단 명단에도 없고, 1935년 김원봉 단장은 조선의열단원 대다수를 참여시켜 조선혁명당을 출범시켰는데, 김근수는 조선혁명당 참여자 명단에 없다"고 꼬집었다.


개혁모임은 또 충칭(重慶) 임시정부가 1945년 12월8일 작성한 '한국 임시정부 직원 권속 교포 명책'(임시정부 직원 및 가족, 현지교민 명단)을 두고 "김 회장의 부모가 광복군이 아니라는 증거"라며 "(해당 교포 명책은) 독립운동가 명단자료가 아닌 교민의 명단"이라고 지적했다. 이 책에는 왕석(김근수의 이명)·김희(전월선의 이명)·왕원웅(김원웅의 이명) 등 김 회장 일가의 이름이 들어 있다. 


개혁모임은 또 "김 회장 일가의 1944년, 1945년 충칭 거주는 확인되지만, 김희(전월선의 이명)는 본명, 고향 및 나이가 틀리고 왕석(김근수의 이명)은 고향이 틀려 의혹투성이"라고 지적했다.


조대형 대기자

광고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포토뉴스더보기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윤대통령 스승의날 편지
  •  기사 이미지 5.11용산 부정선거 수사 촉구집회
  •  기사 이미지 윤석열 정부 2년 성과와 과제 세미나- 주최 윤상현 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정책공감
최신뉴스더보기
우이신설문화예술철도
인기 콘텐츠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