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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04 01: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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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년 오늘, 1·4후퇴의 상흔과 처절함
  • 1.4 후퇴는 대중가요「굳세어라 금순아」의 공간적 배경이다.

혹한의 상황에서 1.4후퇴를 맞은 피난민 일행

1951년 1월 4일 전년도 12월께부터 시작된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전선에서 밀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내주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고 1월 14일 유엔군은 북위 37도선의 중서부 전선에서 30만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된 것이었다. 일방적인 패퇴 끝에 전세를 뒤집고 압록강까지 진격할 때만 해도 승리는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공군(관례대로 표기함)의 등장과 함께 승리는 신기루처럼 스러졌고 전황은 불과 서너 달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1.4 후퇴를 계기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운집된 도시가 부산이었다.


한국전쟁 피란민의 상흔과 치유


부산 인구의 많은 부분은 이북 피란민과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의 전쟁터에서 제외되었고,

임시수도였다는 점에서 안전지대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피란민들 가운데 서울이나 이북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한 사례도 많으나, 정착한 피란민도 많았다. 국제시장에서는 이북 피란민의 성공사례가 많이 소개되기도 한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산 피난민촌 정경

그만큼 이들의 생활력은 주위 사람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로 강했다. 더 이상 피란갈 수 없는 부산에서 뿌리 내리기 위한 피란민들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이들의 피란을 통해 부산에 정착한 곳은 부산의 당감동, 아미동, 감천동, 국제시장, 우암동 등이다. 부산에 정착한 이북 피란민들은 해방 직후 남하해 서울 부근에서 정착했다가 한국전쟁 때 다시 피란하는 경우, 1.4후퇴 이후 피란의 경우로 나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부산으로 곧바로 피란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다른 지역에 1차 정착했다가 다시 부산으로 옮겨왔다. 첫 번째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신분, 즉 공무원이나 지주였던 사람들이 ‘반동’으로 몰려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에서 견디지 못하고 남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초창기 용산 해방촌에 많이 모여 살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서울을 지배하자 또다시 인민군 지배에서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이주하였다.


1.4후퇴 당시 피란은 중공군 개입에 따른 군사 철수와 함께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중공군이 밀려 내려온다’는 소문에 너나할 것 없이 피란보따리를 챙겼다.

피란민들의 직업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피란은 ‘갑작스럽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피란민들은 ‘일시적인’ 피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군인들의 갑작스러운 피란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을 상기하며 만든 가요가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 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6·25전쟁 휴전을 전후한 전쟁과 분단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정서를 담아 부른 노래로 이 정서 덕분에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와 통일이 되면 만나자는 내용으로, 흥남부두 외에도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6.25 당대를 상징하는 가사가 나오며, 이후 영화나 드라마 등에 제목이 자주 패러디 되었다.



1953년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이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표하였다. 때문에 이 노래는 대구의 테마 노래이기도 했다. 노랫말 속의 피난지는 부산이지만, 노래를 만든 박시춘과 강사랑은 실제로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으며 곡도 대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흥남 철수 정경과 전쟁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는데, 흥남 철수는 6·25전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노랫말을 보면 당시대를 상징하는 '흥남부두', '1·4 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과 같은 단어가 들어 있다. 가사를 보면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연인이 생이별을 하고 피난지에서 장사로 생활을 꾸려가며 살고 있는데,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굳세어라 금순아> 3절 가사에는 ‘북진통일’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그러나 미도파 음반에서 1960년경 발매한 현인의 리바이벌  음반에서는 이 부분을 ‘남북통일’로 개사하였다. 호전적인 가사가 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53년 노래를 처음 발표한 당시에는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뿐, 3년간의 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는 여론이 팽배했기에  ‘북진통일’이란 가사는 냉전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오리엔트레코드사의 설립자인 이병주는 

“이 노래의 작사가 강해인, 즉 강사랑이 여순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재기한 첫 작품이 <굳세어라 금순아>였다”고 회고했다. 


대구 송죽극장 맞은편 건물에 이병주가 운영하던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때 강사랑은 오리엔트 식구들과 냉면을 먹으러 가던 중 초라하고 지친 행색의 피난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곡을 착상했다고 한다. 대구의 양키시장과 부산의 국제시장은 피난민들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공간이었고, 이를 보며 자신이 겪었던 피난과 1.4후퇴의 경험과 감정이 밀어닥쳤다. 강사랑의 노랫말을 본 박시춘은 곧바로 작곡에 들어갔다. 그는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서 군용담요를 창문에 겹겹이 가리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곡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다른 대중문화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악극 「굳세어라 금순아」가 1953년 11월에 ,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가 1962년 10월에 개봉되기 하였다.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책이 2002년에 간행되기도 했고, 노래의 내용과는 아무 관계없지만 제목을 딴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가 2002년에,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가 2005년에 방송되기도 했다.


부산은 가수 현인의 고향이며 「굳세어라 금순아」의 공간적 배경이다. 부산광역시에서는 노래와 가수를 함께 기념하는 의미에서  영도다리 옆에 현인 동상과 노래비를 2003년 건립하였다. 송도해수욕장에도 현인 동상과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2007년 세워져는데 비문 내용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는 같은 곡의 노래비가 두 개나 세워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향민의 아픔과 기원을 토로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노랫가락만큼은 경쾌하고 구성지다. 전쟁의 참상에 대한 절묘한 묘사는 '국민가요'로 불릴 만큼 인기가 높았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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