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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 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04 23: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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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발 그리고 춤 이사도라 던컨의 광기
  • 1905년 오늘 1월 5일, 러시아 노동자 장례 행렬 속에서 춤을 추다.


“우리들의 비쳐진 광경은 기다란 행렬이었다. 음울하고 비탄에 잠긴 그들이 관을 메고서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슴푸레한 새벽에 공포에 가득 차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운명의 1905년 1월 5일,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릴 빵을 요구하러 겨울궁전에 왔다가 학살당한 노동자들이었다. 

이 슬프고도 끝없는 행렬이 사람들 앞을 지나는 동안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다시 뺨에서 얼어붙었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노동자 행렬이 하나의 성전이라는 공감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사도라 던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던컨(이사도라 덩컨)은 1877년 5월 26일 달콤한 탐욕의 자본주의가 화려하게 타오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별이 빛날 때’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낸 일이었다. 이사도라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던컨 은행이 파산했고, 고객 중 다수였던 노동자와 하녀들은 시위를 벌이며 그녀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던컨 은행의 파산은 수많은 남녀 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대단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금주령을 모범적으로 지킨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위법자로 만든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던컨 씨는 그저 실패한 은행가로 묘사하기엔 아쉬울 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산 그의 내면은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였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의 거부할 수 없는 연인으로서 매력을 지녔다. 이사도라는 이런 아버지를 성가신 짐인 동시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파산과 이혼으로 인한 궁핍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손수 짠 빨간 망토와 모자를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편물을 팔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큰 소리로 글을 읽어주었는데, 그때 이사도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였다. 이사도라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즐겨 말했다.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리라. 그리고 내가 취한 것에 그대도 취하리라.’


던컨 가족(어머니와 네 남매. 이사도라가 막내다)의 가장 큰 특징은 생계를 위해 끝없이 돈벌이에 매달리면서도 언제나 시와 음악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라는 훗날 자신의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 발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뤄졌고 학교 교육은 쓰레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해변으로 뛰어가 나체로 춤을 추었는데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당대의 천재적 남자들과의 뜨거운 사랑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셸리의 미모사, 꽃의 개화, 벌들의 비행, 오렌지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자유분방하고 찬란한 금빛….’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찬양한 것들이어서 이사도라는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일자리를 구하러 갈 때 이사도라는 이런 글을 썼다.


“내가 태어난 이 다정다감한 땅을 떠나 어린 순례자가 되었고 기차는 동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거대한 로키 산맥을 지나고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는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만만치 않은 무관심과 몰이해,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미국을 떠나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 이사도라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 도자기 전시관에 매료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까지 춤을 추며 길을 가는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고, 이사도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고전 무용의 틀을 깨고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거리와 무대 위를 나비 같이 날아다니던 던컨의 아름다운 시절


그리스 말고도 그녀가 찬양한 것은 니체, 베토벤, 쇼팽, 로댕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라고 했다.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당대의 천재적인 남자들과의 뜨겁고도 짧은, 기이할 정도로 평생을 가는 질긴 사랑으로 점철되었는데, 중년을 넘기면서부터는 그녀가 1000명의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는 푸른 눈의 아름다운 남자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이 아이들이 이사도라 인생의 가장 큰 비극으로 자리 잡는다. 꽃이 만발한 4월의 비 내리는 봄날, 이사도라는 두 아이 데어도르와 패트릭, 그리고 보모와 함께 모베랑이라는 운전사가 운전하는 르노 자동차를 타고 거처인 베르사유에서 파리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춤 연습 때문에 지루해할 아이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는데, 그때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딸 데어도르와 아들 패트릭. 던컨의 비극은 두 자녀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탄 자동차는 센 강을 따라가다 엔진이 꺼졌고 운전사가 차 밖으로 나와 다시 엔진을 걸었을 때 차는 강둑의 경사면 아래로 질주해 물속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차를 강에서 꺼냈을 땐 사고가 난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난 뒤였고, 아이들은 보모에게 매달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로 파리 시민들은 미친 듯이 아이들 이름을 울부짖으며 센 강변을 뛰어다니는 이사도라를 몇 번이고 볼 수 있었다.


금빛 머리칼의 천재 시인 예세닌과의 결혼


아이들이 죽은 뒤 1914년 이사도라는 러시아로 떠났다. 그곳에는 그녀의 비범한 생애 동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고독’이 가공할 만한 존재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예세닌이란 천재 시인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가 대단한 천재일 뿐 아니라 대단한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엄청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처음 보고 이렇게 느꼈다.


“나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처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아마 너는 그 공통점을 모르겠지? 그는 어린 패트릭의 모습이었어. 패트릭이 성장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 



이사도라 던컨과 예세닌


이사도라가 예세닌을 통해 본 것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금발의 아들 패트릭이었다. 이사도라의 예세닌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와도 같은 한없는 이해와 염려, 헌신의 모습을 띤다. 작은 키에 가냘픈 체구, 눈부신 금발, 마치 1월의 딸기처럼 보이는 예세닌과, 춤을 추기엔 너무나 살이 쪄버린 깊고 슬픈 눈빛의 이사도라는 무려 열여덟 살 차이가 났다. 그녀는 유럽 여행을 위한 세관 신고 때문에 예세닌과 혼인 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50세 가까운 나이를 38세로 속였다. 



그들의 15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은 악몽 그 자체였다. 예세닌은 술에 취하면 이사도라를 더러운 늙은 암캐라고 불렀고, 뛰쳐나갈 때까지 폭행했으며, 호텔 기물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파괴했다. 그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렸고 광적으로 돈, 반지, 시계, 술, 신발, 모자, 실크 셔츠, 손수건, 스카프에 탐닉했다. 이사도라가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콘서트에 데려갈 때마다 예세닌은 모든 양복점 앞에 멈춰 서서 맘에 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바로 사버리곤 했는데, 이사도라는 푸른색 정장에 심홍색 넥타이, 흰색 부츠를 신은 예세닌을 옆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금발의 천사가 바로 제 남편이랍니다” 평생에 걸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한 것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그녀에게 예세닌과의 삶은 추함 그 자체였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예세닌과 함께 떠난 미국 순회공연은 술과 연습 부족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선 그녀의 종말을 더욱 재촉했다. 게다가 공연 도중에 나체에 가깝게 흘러내린 의상 때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 등으로 미국 언론에 묘사되었다. 그때 이사도라는 이렇게 반박했다.


“왜 내 몸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며 청교도주의의 속박과 편협한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숨기는 것이 외설적인 것입니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잘 있거라, 벗이여’란 시를 남기고 서른 살의 나이에 손목을 그어버린 예세닌의 자살 이후 이사도라는 니스로 거처를 옮기고 좌우명을 ‘무한하게’로 바꿨다. 이 말은 한때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나 이제는 술 한 병 살 수 없는 가난뱅이 전직 무용수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만은 혐오한다는 그녀 식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에는 리허설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들고 나타나고,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돈이라면 극심한 가난이 예상되어도 거부했으며, 자연스러운 신체 동작을 숭배했고, 예술 세계가 잃어버린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거침없이 관습에 도전했으며, 소리와 빛처럼 만질 수 없는 자유스러운 춤을 추었던 이사도라의 명예는 추문과 비극에도 결코 손상될 수 없었다.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타오르는 양초 사이에 누운 시신 옆에는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이사도라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사도라가 늘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어떤 존재를 느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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