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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06 23: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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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음악사 최고의 작곡가 모차르트의 첫 연주 시연
  • 295년 전 오늘, 1762년의 모차르트는 열광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서양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이다.

1762년 오늘, 그가 이 인류사에 태어나 처음으로 시연한 날이다.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추구했으며,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합창곡, 성악곡 등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오로지 아들의 음악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모차르트는 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건반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6살 무렵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건반악기 주자가 되었으며, 오르간과 바이올린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작곡에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해 6살 때 미뉴에트, 8살 때 교향곡, 11살 때 오라토리오, 12살 때 오페라를 작곡하는 기록을 세웠다.


모차르트의 나이 6살이 되던 1762년,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를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다. 이것이 모차르트 일가의 첫 번째 연주 여행이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을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썼다.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했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 궁정을 방문해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으며, 여기서 쇼베르트의 건반음악과 글룩의 오페라를 감상했다.



1764년, 모차르트 일행은 프랑스 칼레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던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찬 바흐와 그의 동료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모차르트 가족은 1765년 겨울은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인 길, 겐트, 로테르담, 헤이그를 여행했으며, 1766년에는 프랑스의 파리, 디종, 스위스의 제네바, 로잔, 베른, 취리히, 빈터투르, 딜링겐,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그해 11월,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1768년,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빈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 〈바보 아가씨(La Finta Semplice)〉와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를 작곡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다. 빈에서는 오페라 외에 바이젠호이스 성당의 헌당식을 위한 미사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769년 말부터 1773년까지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밀라노의 사마르티니를 비롯해 이탈리아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를 여행했으며, 특히 로마에서는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밀라노에서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를 초연했으며, 파도바에서 오라토리오 〈풀려난 베툴리아(La Betulia Liberata)〉의 작곡을 위촉받았다.


1773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가 되었다.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 현악 4중주, 소나타, 미사곡, 세레나데, 오페라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런 성공에도 그는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했다. 1년에 150플로린밖에 되지 않는 낮은 보수와 오페라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뮌헨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






1777년 8월, 그는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가 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파리, 뮌헨 등을 방문했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에서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제안했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여행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들을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이려고 애썼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연봉은 450플로린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를 마지못해 수락했으며,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는 길에도 만하임과 뮌헨에 들러 다른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할 수 없이 1779년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 후로도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1781년,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가 뮌헨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해 3월,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과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에 머물고 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소환을 받았다. 대주교의 부름을 받고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그가 자기를 종처럼 취급하는 것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툰 백작부인이 그에게 연주회를 제안했다. 잘츠부르크에서 그가 받던 보수의 절반이 넘는 연주료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대주교가 이것을 금지했다. 이 일로 불만이 극에 달한 모차르트는 대주교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자신을 해고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대주교는 매우 모욕적인 방식으로 그를 해고했다.


이렇게 해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결별한 모차르트는 그 길로 빈으로 갔다. 대주교와 화해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강요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무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았다. 고용주의 속박에서 벗어난 모차르트는 마음껏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수없이 많은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1782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독일 오페라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의뢰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Die Entfuhrung aus dem Serail)〉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전까지 오페라는 대개 이탈리아어로 쓰였는데,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통해 독일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오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다.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와 더불어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이해에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1786년과 1787년,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과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런 걸작들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으면서 모차르트는 대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는 안정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실 가족이나 귀족 앞에서 연주를 하거나 귀족 자제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터키 간의 전쟁으로 귀족과 왕실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수입이 줄었다.


1787년 12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빈에 잡아 두기 위해 파트타임 일자리를 제안했다. 리도우텐 홀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무도회를 위한 춤곡을 작곡하고 일 년에 800플로린을 받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모차르트에게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1788년, 모차르트 가족은 빈 근교로 이사를 갔다. 집세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아주 비굴한 어조로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도 썼다. 1789년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재정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포츠담,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등지를 방문했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극심한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었다.



그해 6월, 빈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왕실로부터 새로운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것이 1790년에 초연된 〈여자는 다 그래(Così fan tutte)〉이다. 이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발표한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ote)〉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 익명의 사람에게 〈레퀴엠(Requiem)〉 작곡을 의뢰받고 곡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1791년 12월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6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여흥을 위한 가벼운 음악부터 본격적인 연주회용 음악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가 여흥을 위해 작곡한 음악에는 세레나데와 디베르티멘토가 있다. 이 중 세레나데는 본래 밤에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는 노래였는데, 나중에는 기악으로 연주하는 모음곡 형태로 발전했다. 모차르트는 주로 귀족들의 오락이나 축제, 사교 모임을 위한 가벼운 음악으로 세레나데를 작곡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Eine kleine Nacht Musik)〉인데, 이것은 독일어로 '작은 밤음악(小夜曲)'이라는 뜻이다. 1787년 작으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느린 로망스, 3악장 독일 민속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활발한 분위기의 론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1776년 잘츠부르크 시장 하프너의 딸 엘리자베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쓴 세레나데 제7번 '하프너(Haffner)', 우편마차나 역마차에서 사용하는 나팔을 6악장에 도입한 세레나데 제9번 '포스트호른(Posthorn)'이 있다.



모차르트는 독주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20여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41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 피아노는 여성의 악기로 널리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가볍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며, 대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서정적인 아다지오나 안단테, 3악장 카덴차가 있는 경쾌한 론도로 구성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3악장에 '터키 행진곡(Turkischer Marsch)'이 나오는 제11번이다. 대개의 소나타는 1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곡은 1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악장은 미뉴에트이며, 3악장이 행진곡풍의 론도로 작곡된 '터키 행진곡'이다.



실내악에서는 현악 4중주, 피아노 5중주, 현악 5중주, 클라리넷 5중주, 플루트 4중주, 오보에 4중주, 혼 5중주 등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남겼다. 대개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다. 이 장르의 대표곡으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789년에 작곡한 〈클라리넷 5중주〉가 있다. 악기 편성은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현악 4중주 편성에 클라리넷 한 대가 추가된 형태이다.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목가적인 분위기의 느린 악장, 3악장 우아한 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변주곡 형식의 경쾌한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클라리넷과 현악 4중주가 서로 대응 관계를 이루며 음악을 이끌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모차르트는 근대적인 의미의 협주곡 양식을 처음으로 완성시킨 작곡가로 꼽힌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45곡이나 작곡했는데, 독주 악기의 종류도 피아노, 바이올린,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보에, 혼, 클라리넷, 바순, 플루트, 플루트와 하프 등으로 다양하다. 이 중 바이올린 협주곡은 대부분 20세 때 작곡한 것으로 아름다움과 예술적 완성도에서 있어서 나이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여 준다. 한편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25곡으로 대부분 장조로 작곡되었다. 하지만 1785년에 쓴 제20번만은 이례적으로 단조로 되어 있다. 피아노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곡은 고전주의를 넘어 낭만주의를 예고하는 협주곡으로 알려져 있다. 극적인 내용과 스케일의 방대함이 가히 교향곡에 비견할 만하다. 1악장 교향곡처럼 장대한 스케일의 소나타 형식, 2악장 노래하듯 연주하는 로망스, 3악장 활달한 론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역시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모차르트는 8살 때인 1764년에 처음 교향곡을 쓰기 시작해 1788년까지 24년 동안 모두 41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은 대체로 하이든이 세운 교향곡의 틀, 즉 빠른 템포의 1악장과 4악장 사이에 느린 2악장과 미뉴에트풍의 3악장이 들어가는 고전주의 교향곡의 모범을 따르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이탈리아풍과 규모가 큰 빈풍으로 대별된다. 대부분의 교향곡이 장조이며, 25번과 40번만 단조로 작곡되었다. 41곡 중 마지막에 작곡한 〈교향곡 제39번〉, 〈교향곡 제40번〉, 〈교향곡 제41번 '주피터'〉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중에서 1788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40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1악장은 서주 없이 곧바로 제1주제로 들어가는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율이다. 느린 템포의 2악장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분위기가 고조된다. 3악장은 소박한 민요풍의 미뉴에트 악장이며, 4악장은 높은 음역의 경쾌한 동기와 격렬하고 극적인 모티브가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썼는데, 독일어 오페라로는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마술피리〉가 있고, 이탈리아어 오페라로는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여자는 다 그래〉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는 1786년에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이다. 이 작품은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하나로 줄거리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후편에 해당된다. 사랑하는 로지나와 결혼한 알마비바 백작은 결혼 후에도 천성적인 바람기를 버리지 못하고 피가로와의 결혼을 앞둔 하녀 수잔나를 차지하려 한다. 이런 백작의 마음을 알아챈 백작부인과 수잔나, 피가로가 서로 짜고 백작을 골려 준다는 것이 오페라의 줄거리이다. 1막에서 피가로가 부르는 〈더 이상 못 나르리(Non piu andrai)〉, 2막에서 백작부인이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부르는 〈사랑을 돌려주오(Porgi amor)〉, 사랑에 눈뜬 소년 케르비노가 부르는 〈사랑의 괴로움 그대 아나(Voi che sapete)〉, 3막에서 백작부인이 옛날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어디로 갔나 그 시절은(Dove sono)〉,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편지를 쓰면서 부르는 편지의 이중창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Che soave zefiretto)〉가 유명하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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