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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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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1-01-11 09: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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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1월11일, 호남선 개통 107년 누구를 위한 철도였나?
  • 근대화의 상징 뒤에 숨겨진 일제의 수탈과 지배

근대화의 상징, 철도, 억압과 공포의 대상


호남선 분기점 대전역 모습

오늘 2021년 1월11일로 호남선 철도 역사가 107년이 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사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철도’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특히 선진국에서 철도는 “국민경제의 형성과 국민국가 수립의 지렛대”로 활용되며 사회 여러 분야의 전방위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근대화의 상징으로 흔히 알려진 ‘철도’가 실상 한국에서는 일제가 “수탈과 억압의 도구로서” 만들었고 사용했던 식민지의 산물이었음을 주장한다. 저자가 철도가 한국 사회에 제공한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철도가 가진 식민지적 성격의 특수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사실 한국 철도의 역할과 사명은 선진 여러 나라와 무척 달랐다. 한국 철도는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고, 이에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첨병 구실을 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철도는 일제의 수탈과 억압의 도구로서, 또한 일본이 제국주의 세력을 아시아대륙으로 뻗게 하는 동맹으로 기능했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입과 함께 등장한 철도는 식민지의 근대화를 위한 첨병이었다. 외국으로부터 철로 부설권을 사들여 경인선을 개통함으로써 조선의 수도와 개항장 인천을 관통하는 축을 움켜쥐게 된 일본은 1905년부터 경부선·경의선에 이어 1914년엔 호남선을 개통했다.


물론 군사적 목적이 앞선 철도 개통은 일제의 억압과 침탈의 채찍으로 활용됐으나, 나중엔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철도는 일상생활에 '근대적 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시간, 분, 초 단위로 생각하게 했고, 일반인들도 열차를 타고 여행까지 할 수 있도록 했다.


곡물을 실어 나르던 철로의 흔적이 수탈의 아픔을 대신하고 있다.

 호남 지방은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호남 지방의 서부를 관통하는 호남선은 우리나라의 간선 철도인 경부선·경의선·경원선에 비해 정치적·군사적 중요성 보다는 경제적 유용성이 큰 노선이어서 일찍부터 철도 개발 필요성이 요구됐던 곳이다.


1896년 프랑스는 호남선 철도부설권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1904년 6월에는 호남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강경~군산 간 철도와 공주~목포 간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호남철도주식회사는 주식 공모로 자금을 마련함으로써 우리 손으로 직접 철도를 직접 철도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군사상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경목철도(호남선)를 자신들이 건설하고자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부설권을 취소하도록 하였다.


그 후 호남선은 1911년 7월 대전∼연산(39.9㎞) 개통을 시작으로 연산∼강경(1911년 11월), 강경~이리(1912년 3월), 이리∼김제(1912년 10월), 김제∼정읍(1912년 12월), 나주∼학교(1913년 7월), 학교∼목포(1913년 5월), 광주 송정∼나주(1913년 10월), 정읍∼광주 송정(1914년 1월)이 차례로 개통됐다.


그러나 전주의 지주들은 지맥이 끊기고 지반이 흔들려 도시가 몰락한다는 이유로 호남선 전주 통과를 반대했다. 익산에 군산선이 개통되고 근대 문명을 뒤늦게 안 뒤에야 철도를 유치, 1914년 12월 익산~전주 전라선 첫 구간을 폭 좁은 협궤철도로 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개통된 호남선은 호남 지방의 미곡을 일본으로 수송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호남선의 주요 지점에 미곡 집산지가 들어섰고, 미곡 적출항으로 연결되는 지선도 개통됐다. 대전역에서 호남선과 경부선을 연결할 때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접속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일본이 철도 개설을 위해 노동력을 빼앗고 부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이 겪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인들은 집과 땅, 묘지를 무상으로 빼앗겼고, 공사 현장에서 총살에 처해졌다. 반일 감정은 철도 정거장의 공격으로 나타나 1900년대 초반 의병들에게 경의선 일산역·경부선 소정리역 등이 파괴됐다. 1904년 7월부터 1906년 10월까지 철도와 관련해 처형당한 한국인은 사형 35명, 감금 및 구류 46명 등 257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비내리는 호남선 마지막 열차 ···”


누구나 노래방에서 한번쯤은 불러봤음직한 노래가사다. 바로 남행열차의 첫 소절이다. 남행열차는 목포만 지나는 열차는 아니지만 그 종착역이 목포에 있어 곧 목포의 또 다른 상징이 되고 있다.

남행열차는 목포의 생활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았고, 목포를 서남단의 고립된 도시가 아닌 상업의 요지로 키워준 것도 뭐니뭐니해도 이 남행열차였다. 이 남행열차의 옛 이름이 호남철도이고 그 전 이름이 경목(京木)철도였다.


우리는 경인선, 경부선 등 주요한 모든 철도를 일본이 세운 것으로 안다. 물론 호남철도의 전통도 1914년 1월에 이루어졌으니 우리가 세웠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강점되기 전에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호남철도를 부설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그런 일은 그 존재조차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하건대 호남철도는 우리 민족이 벌인 자력건설운동 최후의 보루로서 그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하다.


대한제국에 들어오면 철도의 이권을 옹호할 뿐 아니라 그 부설의 필요성을 인정해서 적극 추진해 나갔다. 그 최초의 시험선이 경목선(京木線)이었다. 이 문제는 1898년 6월 18일 논의하고 다음날 재가되었다. 7월 6일에 철도사(鐵道司)를 설치했고, 7월 27일에는 철도사를 1등국인 철도국으로 개칭하였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 나갔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외국의 차관조차도 거절했고, 어디까지나 자력 부설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자금사정으로 여의치 못하던 중 1904년 6월에 서오순(徐午淳)에게 부설권을 허가하였다. 이때 경목철도의 이름이 호남철도로 바뀌었다. 호남철도는 정부 및 민간인에 의한 철도부설운동 중 그때까지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강점을 앞둔 우리 민족이 마지막으로 또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자력건설운동의 보루가 호남철도였던 것이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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