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11 21:53:16

기사수정
  • 98년 전 오늘, 1923년 1월12일의 종로 경찰서 투척사건
  • 김상옥은 사이토 암살 계획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김상옥의사가 투척할 당시의 종로경찰서 사진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은 1923년 1월 12일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김상옥은 폭탄과 권총을 지닌 채 잠입하여 밤 8시 10분경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98년 전 오늘의 일이다.

김상옥(한국 한자: 金相玉, 1890년 1월 5일 ~ 1923년 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김영진(金永振), 아호는 한지(韓志)· 의엄(義嚴)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호적상에는 조선개국498년 즉 1889년 1월 5일생으로 나와 있다. 지금까지 각종 전기 등에 1890년 생으로 씌어있고, 집안에서 1890년 생 범띠로 알고 있다고 하나, 동지 한훈과 "동갑이었다"고 했다는 점 등을 보아 1889년생인 한훈과 같이 김상옥도 호적상의 1889년생이 틀림없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성부 어의동에서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과 김점순(金占順)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조판서 김영정의 15대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녔다. 10대 중반부터 기독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감리교회를 다녔다. 야학에 다니면서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고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실제로 김상옥의 철물점은 (명칭:영덕철물상회) 한 때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었다. 김상옥은 이를 모두 독립운동에 쏟았다.


김상옥의사의 투척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김상옥은 1922년 5월 5일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신사상에 접했으며, 한살임 정강 및 선언을 통해 종교를 배경으로 한 민족 혁명에서 유물론적 계급 혁명으로 사상이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 임정 군무부 행정관 직책으로 발탁된 그는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알려져 있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권총 두 자루로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군경 15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하여 의젓하게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과 논란이 일고 있는데,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 장본인 인지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상옥의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있었다. 총알을 맞아가면서도 그 정도로 싸웠으니 매우 전투능력이 뛰어났음을 알수 있다. 생포가 목적이었는데, 의열단원 김상옥이 일본 군경들과의 교전 중 자결했기 때문에 일본 군경들은 과연 김상옥이 폭탄을 투척하였는지에 대해 심문해 볼 수 없었다.[주 3] 효제동 총격전 직후 3월 14일 총독부 경무국의 야마구치 고등과장은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김상옥이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한 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진술한 자가 없었다. 의열단원들도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윤익중 - 재판정에서 "그날 그 시각 김상옥과 함께 종로대로를 걸었다, 그때 종로서를 지나온 학생들에게서 폭탄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김상옥은 그런식의 폭탄투척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고 진술했다. -다른 동지들의 증언도 같은 의견이었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 신문에서 이 진술을 기사에 실었고, 이와 함께 "김상옥은 정녕 폭탄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석하여 전했다. 또, 그 때 김상옥은 사이토 암살 계획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찰 추적과 경계, 감시를 강화시킬 일을 스스로 자초했을 가능성은 적다. 전에도 이런식의 치밀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비상경계 상태를 취했었으며, 종로경찰서 폭탄사건 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견이 많이 제기됐었으며, 미와 경부보도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은신처는 혁신단 시절의 동지인 이혜수의 집이었는데, 효제동은 그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종로경찰서 사건에 대해서는 김상옥이 결행했다는 설이 정설이나, 오래 준비해 온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며,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조직의 소행이라는 이설도 있다.


조대형 대기자

광고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포토뉴스더보기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윤대통령 스승의날 편지
  •  기사 이미지 5.11용산 부정선거 수사 촉구집회
  •  기사 이미지 윤석열 정부 2년 성과와 과제 세미나- 주최 윤상현 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정책공감
최신뉴스더보기
우이신설문화예술철도
인기 콘텐츠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