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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13 22: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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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년 전 그날, 1987년 1월14일“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
  • 그 비극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고 있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 모습이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 사망한 현장인 대공분실 509호는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14일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불법 체포돼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수사관들에게 고문·폭행을 당해 사망한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으나 언론·의학·종교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지면서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됐다.

박종철 열사는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86년 4월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된 뒤 같은 해 7월15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학생운동을 이어가던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13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됐다. 경찰이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 열사를 불법으로 체포한 것이었다. 다음날인 14일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인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박종철 열사가 계속 답하지 않자 물고문·전기고문이 시작됐고 결국 박종철 열사는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사실 이 사건은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지만, 우연히 사건의 단서를 접하게 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은 기사 이후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종철 열사 사망 다음날인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박종철 열사 사망에 대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문에 의한 사망이 아닌, 단순 쇼크사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16일 사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중앙대병원 오연상 전문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했고, 17일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담당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황적준 박사가 물고문과 전기고문 흔적이 있다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면서 진상이 속속 밝혀졌다.


언론의 의혹 제기가 이어지자 사건 발생 5일 만인 19일 경찰은 마지못해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수사경관이던 조한경과 강진규를 구속했다. 이후에도 고문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가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김종호 당시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해임하기에 이른다.

넉달 뒤인 1987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은폐·조작을 폭로했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했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모두 5명이라는 내용이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과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서울지검은 1987년 2월 1차 수사에서 고문 경찰관 2명으로부터 “고문치사의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받고도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으며, 2차 수사에서도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범인 축소 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전혀 없다”고 무혐의 처리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서울지검 검사로 재직하면서 1·2차 검찰 수사에 모두 참여했다.


전두환 정권은 5월26일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등 권력 내 핵심인물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했으나, 시민들의 민주화투쟁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거세진 시민들의 민주화투쟁은 6월항쟁으로 이어져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 개정을 쟁취해냈다.


1월 16일 중앙대 전문의 오연상은 처음 목격자로서 당시 남영동 509호실에는 물이 흥건하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고문에 의한 사망사실이라고 했다.


1월 17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와 한양대 박동호 교수는 시체부검 결과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고 폐에는 물이 차 있었다는 부검결과를 발표하면서 고문에 의한 사망사실을 확인했다.


정부는 박종철 고문 담당 경찰인 조한경과 강진규를 구속했다. 5월 18일 광주 민주항쟁 7주년을 맞아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군 사망에 대한 추모집회를 열면서 민주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월 18일 정부는 치안본부 5차장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과 박원택을 구속했다. 또한 내무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해임했다.


신임 내무장관 정호용은 기자회견에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릴 수가 있는가라는 말로서 고문을 은폐하려고 했으나 정호용은 5·18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광주사태의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함으로써 세간에는 그를 비웃는 말이 나돌았다. 또한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한 말인 ‘탁 치니 억하고 죽더라’ 라는 말 또한 세간에 유행어가 되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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