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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15 0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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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년 1월15일 자유대한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창설되다.
  • 현 정권, 국방경비대를 국군의 모태로 인정하지 않는 비극한 사실

오늘의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된 국방경비대(사진은 국군의 날 퍼레이드 모습)

8·15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창설되어 대한민국국군의 모체가 되었던 군사조직.개설 

미군정 당국은 당초 국방경비대의 명칭을 ‘조선경찰예비대’로 명명하였으나, 우리나라측에서는 ‘남조선경비대’라고 호칭하였다.


국방경비대는 당시 주한미국육군사령부의 뱀부(BAMBOO)계획에 의거, 국내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2만 5000명 규모의 병력을 책정하여 남한의 8개 도청소재지에 각각 1개 중대(장교 6명, 사병 225명)씩의 경비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통위부(당시 국방부) 산하기구로 하여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태릉)주 01)에서 1개중대를 창설하고 이를 모체로 1개 연대로 증편한 것을 효시로, 8개 도청소재지에 각각 1개 중대씩을 편성하였으며, 제1연대본부에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이들 부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 뒤 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으며, 총사령부에는 총참모장 밑에 인사·정보·작전교육·군수국의 일반참모부와 재정처·의무처·법무처·감찰감실·통신과·군감대를 두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경비대 총사령부는 1947년 12월 1일까지의 기간 중, 그 예하에 3개 여단(서울·부산·대전)을 창설하여 해당 지역에 위치한 각 도의 연대들을 통괄하게 하는 한편, 계속하여 6개 연대와 2개 여단을 추가로 창설하였다.


기능과 역할조선경비대는 국가 중요시설(항만·미군부대 등)의 경비임무와 좌익분자들의 폭동진압임무를 수행하였으며, 특히 1948년 4월 3일 제주 4·3사건이 발생하자 제주도에 주둔 중이던 제9연대를 투입하여 6월 14일까지 이를 진압하였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9월 1일 국군으로 편입되고, 9월 5일 대한민국육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국군조직법」에 의하여 정식으로 대한민국국군으로 편입되었다.


현 정권이 주장하는 국군의 기원, 광복군 요원들

젊은 세대는 말할 나위 없고 기성세대의 기억에서도 잊혀져 있지만 지난 15일은 8·15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창설돼 우리국군의 모체가 되었던 국방경비대(미군정 당국은 당초 국방경비대의 명칭을 ‘조선경찰예비대’로 명명하였으나, 우리나라 측에서 ‘남조선경비대’라고 호칭)가 탄생한 날이다.


 국방부가 1984년 편찬한 ‘국방사’에 의하면 국방경비대는 당시 주한미국육군사령부의 뱀부(BAMBOO)계획에 의거, 국내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2만 5000명 규모의 병력을 책정하여 남한의 8개 도청소재지에 각각 1개 중대(장교 6명, 사병 225명)씩의 경비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통위부(미군정기의 국방과 경비를 전담하던 기구. 오늘의 국방부) 산하기구로 하여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태릉: 지금의 육군사관학교)에서 1개 중대(제1연대)를 창설한 것을 효시로, 8개 도청소재지에 각각 1개 중대씩을 편성하였으며, 제1연대본부에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이들 부대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해방이후 군대의 필요성이 화급한 시점에서 국방경비대는 우리 국군의 효시이기도 하다. 국방경비대 창설 주역 또한 우리 군의 최고 원로로 ‘6․25전쟁 영웅’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일컬어져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군 고위 장성이나 주한미군부대에 부임하는 미 장성이라면 전장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전쟁 영웅을 한번 만나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요, 특히 그가 저술한 [군과 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나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과 같은 책에 장군의 친필 서명을 직접 받게 되면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감격해 한다고 한다. 필승불패의 노(老) 장수(將帥) 백선엽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백선엽 장군은 현재 몇 분 계시지 않은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창군동우회 회원이다.


 창군동우회는 해방 직후 서울에 세워진 군사영어학교 출신 간부들의 모임이다. 군사영어학교는 미군정 당국이 장차의 주한 미군 감축 및 철수에 대비해 한국에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에 입각한 토착군사력을 양성하고자 영어를 이해하는 간부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개교했다.


 이듬해인 1946년 4월 폐교 전까지 110명이 졸업해 장교로 임관되었고, 나머지는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로 편입되었다가 임관하였는데, 이들 창군동우회원들은 국군의 창설과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사주와 중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 김일성이 불법 남침을 개시한 6 ·25전쟁에서는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결정적 공훈을 세웠다.


 결국 오늘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前身)인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된 지 75년이 되는 해다. 1945년 8월 광복 후 휴전선 이남에 주둔했던 미 군정(軍政)은 이듬해인 1946년 1월 15일 한국의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만들었다. 조선경비대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출범 후 한국의 정식 국군으로 재탄생한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조선경비대에 참여함으로써 국군은 북한의 인민군이 가질 수 없는 광복군의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군은 핵과 미사일이라는 북한군의 가공할 만한 비대칭 전력이라는, 창군 이래 가장 파괴력이 큰 북한의 도발에 직면하고 있다. 북한은 새해 벽두 4차 핵실험을 감행하며 군사적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우리 군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체계 및 킬체인(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을 사전에 탐지하고 선제 타격하는 체계) 구축과 북한을 위협할 수 있는 우리만의 비대칭 전력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한반도 유사시 아직 작전을 지휘할 권한이 없는 우리 군은 주한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을 되돌려 받아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고질적인 방산비리와 병영 악습 철폐, 정예강군을 위한 국방개혁 등도 우리 군이 앞으로 차질 없이 해 나가야 할 과제들이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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