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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19 0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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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년전 오늘 2020년 1월19일 신격호의 이승과의 고별
  • 바브민트껌의 기원을 만든 롯데왕국 황제의 파란만장함

롯데그룹 고 신격호회장

1년전 오늘 롯데그룹을 창업한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숙환으로 별세한 날이다. 향년 99세였다. 고 신격호 명예회장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 유학 중 ‘풍선껌’ 사업을 시작으로 롯데를 한·일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를 망라한 재계서열 5위의 대기업으로 키워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신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농부의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신문과 우유배달을 하며 고학했다.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한 일본인이 사업을 해보라며 당시 돈 5만엔을 내줬으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첫 공장이 폭격으로 전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비누 제조·판매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하면서 사업 기반을 만들었다.


첫 히트는 ‘껌’이었다. 주일미군의 영향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껌을 만들어 팔면서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를 만들 정도로 사업이 성장했다. 천연 치클을 이용해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품질 좋은 껌을 만든 게 주효했다. 그는 당시 회사 이름을 ‘롯데’로 붙였는데, 독일 문호 괴테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이후 유럽에서 기술을 들여와 만든 초콜렛으로 시장을 장악했고, 이후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하며 성공했다.


일본에서 기업인으로 자리잡은 그는 다시 고국땅을 밟고 투자에 나섰다. 기업보국(企業報國) 이라는 기치아래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롯데제과에 이어 롯데그룹은 1970년대에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에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다. 6년 공사 끝에 1973년 지하 3층, 지상 38층의 당시 최고층 빌딩으로 1000여 객실을 갖춰 개관한 롯데호텔은 당시 동양 최대 초특급 호텔로 1억5000만달러가 투자됐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금액이다. 신 명예회장은 “한국의 장래를 깊이 생각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신격호회장의 영면하고 있는 묘소

신 명예회장은 또 국민 소득수준이 높아진 데 비해 유통이 취약한 것을 발견하고 백화점 사업에 도전해 현 롯데백화점 본점인 ‘롯데쇼핑센터’를 1979년 12월 문열었다. 이외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등으로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그는 제철소도 건설할 뻔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직전 한국 정부로부터 모국에 제철소를 건립하라는 권유를 받은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국가 기간산업인 제철·제강을 국영으로 추진하기로 하면서 박태준씨에게 바통을 넘겼다.


1984년에는 세계 최대 실내 테마파크인 잠실 롯데월드 사업을 추진했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월드를 통해 한국의 관광산업은 문화유산 등 있는 것을 보여주는 단계에서 볼거리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수준으로 발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임직원은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잠실에 놀이공원은 승산이 적어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이 “오픈을 하고 1년만 지나면 교통 체증이 생길 정도로 상권이 발달할 것”이라고 내다보며 밀어붙이면서 1989년 문을 열었다. 이에 관광산업 진흥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관광산업 분야에서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롯데지주 측은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은 정직과 봉사, 정열로 요약할 수 있다”면서 “시작한 사업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다른 부분을 엿보지 않는 그의 경영소신 덕분에 현재 관련 사업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고 말했다. 신 명예회장은 평소 임원들에게 “잘하지도 못하는 분야에 빚을 얻어 사업을 방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미래 사업 계획을 강구해 신규사업 기회를 선점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유족으로는 그가 18세였던 1940년 동향 출신인 노순화 여사(1951년 별세)와 결혼해 낳은 장녀 신영자 전 롯데장학복지재단 이사장, 그리고 1952년 일본에서 결혼한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와 사이에 낳은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있다.



말년은 평탄치 못했다. 일본 롯데 경영을 맡은 신동주와 한국 롯데를 맡은 신동빈 사이에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3년간 이어졌다. 총수일가 등의 횡령ㆍ배임 혐의 사건으로 기소돼 2018년 징역 3년과 벌금 30억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고령을 이유로 구속되지는 않았다.

 10남매(5남 5녀)의 장남인 신 명예회장은 3명의 부인과 4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신 명예회장의 첫번째 부인은 고(故) 노순화씨로 194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을 두고 있다.

신 명예회장은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신영자 이사장은 신 명예회장이 일본에 건너간 시기에 태어났다. 때문에 신 명예회장은 노씨와 신영자 이사장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껌 사업을 시작하고 롯데를 설립하고 종합제과 사업에 착수했다. 1952년 일본 유력 가문의 딸인 시게미스 하츠코씨(重光初子)와 결혼했다.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일본명 시게미쓰 히로유키, 重光宏之)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시게미쓰 아키오, 重光昭夫)이 두 사람 슬하의 자식이다. 두 사람은 유년 시절 일본에서 자랐다.


신 명예회장은 2015년 신동주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의 편에 서는 등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은 그룹내 이사직에서 물러나며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한·일 국교가 수교된 이후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국내 복귀한 신 명예회장은 1970년대 하이틴 스타 서미경씨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이 신 명예회장과 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 명예회장은 사업 초기부터 형제들도 경영에 참여 시켰으나 잦은 불화를 빚었다. 2남 고(故) 신철호 롯데사장의 경우 1950년대 회삿돈 횡령 의혹으로 구속되며 사이가 멀어졌다.


3남 신춘호 농심 회장은 라면 사업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라진 경우다. 신춘호 회장이 1965년 한국에 돌아와 라면사업에 진출했는데, 신 명예회장이 "시기상조"라며 말렸다.


그런데도 신춘호 회장은 고집을 꺽지 않았고 신 명예회장은 "롯데라는 사명을 쓰지 말라"고 일갈했다. 신춘호 회장은 사명을 '농심'으로 정한 뒤 신 명예회장과 수십년간 왕래를 끊었다.


신 명예회장은 5남 신준호 푸르밀 회장과도 관계가 좋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부동산 실명제가 시행되며 토지 분쟁을 벌였다. 막내 여동생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과도 그룹 로고를 두고 법적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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