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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19 22: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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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기의 미녀, 오드리 헵번의 숨겨진 아픔
  •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손길을 내밀었다.


로마의 휴일’‘티파니에서 아침을’‘마이 페어 레이디’ 등 숱한 명화로 전세계 영화팬의 추억에 남아있는 원로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오랜 투병생활끝에 20일 타계한 날이 28년 전 오늘이다


유니세프(국제아동보호기금)의 존 어셔 대변인은 이날 대장암으로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해오던 오드리 헵번이 스위스 제네바湖의 톨로체나즈 마을 자택에서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를 일기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찬란히 빛나는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운 모습, 그 뒤에 숨겨진 아픔을 아는가? 


오드리 헵번이 열 살 되던 해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녀가 살던 마을을 점령한 독일군은 식량과 물자 공급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린 오드리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언제 폭격을 맞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가 처음 유니세프를 만난 곳은 바로 그 전쟁터였다. 아직 유니세프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전, 유니세프의 직원들은 전쟁터의 어린이들에게 긴급구호 물자를 전달해주었다. 어린 오드리는 그 영양식을 먹고 꺼져가는 생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연기와 발레를 배워 배우가 된 이후에도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인해 각종 만성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어린이를 돕는 것은 희생이 아니다, 선물이다."


오드리 헵번은 화려한 배우로서의 길을 접고 어린 시절 유니세프에게 받은 도움을 전 세계 어린이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1988년, 유니세프의 국제친선대사로 임명된 오드리 헵번은 어린이를 돕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했다.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와 함께 에티오피아로 첫 여행을 떠났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된 가뭄과 내전으로 인해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전혀 없었다. 어린이가 건강하게 자라기엔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수많은 에티오피아의 어린이에게 18톤 상당의 영양식을 직접 나누어주었다. 


그 이후에도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어린이들이 고통받는 곳엔 오드리 헵번이 있었다. 유니세프 구호팀과 함께 수단, 케냐, 온두라스, 소말리아 등 12개 국가를 방문하여 영양실조 치료식, 식수, 백신, 치료제 등의 구호물품을 전달하였다. 

오드리 헵번이 유니세프와 마지막으로 간 곳은 800만 명이 굶주리고 있는 소말리아였다. 어찌 된 이유인지 여행 내내 그녀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계속하며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손길을 내밀었다. 


소말리아 여행을 마친 후, 신체적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에 간 오드리 헵번은 대장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큰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암세포가 몸 전체로 퍼진 상태여서 의료진은 더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1993년 1월 20일, 오드리 헵번은 두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름다웠던 생을 마감했다. 


어린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던 한 기자에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죄 없는 어린이가 지옥과 다름없는 곳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편히 호텔에 앉아 페트병에 든 물을 마실 수 있겠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이건 저의 희생이 아니라, 제가 편해질 수 있도록 어린이가 제게 준 선물이다.”



오드리 헵번은 잠들었지만, 유니세프는 여기 있다.




오드리 헵번은 이제 여기 없지만, 세상과 작별하기 직전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은 유니세프가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올해로 70년째 유니세프는 155개 국가에서 전쟁과 재해로 고통받는 어린이를 위해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드리 헵번이 살아생전 남긴 말을 기억해 본다. 

“저는 유니세프가 전 세계 어린이를 위해 하는 일을 깊이 신뢰하며 감사하고 있어요. 유니세프는 전 세계 어린이에게 큰 희망이라는 건 제가 보장할 수 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9년 3월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은행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오드리 헵번은 지난 53년 그레고리 팩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영화‘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사브리나’(54년),‘퍼니 페이스’(57년),‘티파니에서 아침을’(61년),‘마이 페어 레이디’(64년) 등 26편의 작품을 통해 티없이 맑은 순진한 여성상을 표출해 온 헵번은 60년대 이후 이따금 단역으로 스크린에 모습을 비춘 것을 제외하고는 은막에서 자취를 감췄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런던의 사립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네덜란드에서 휴가를 보내던중 2차세계대전을 맞아 전쟁의 공포를 체험했던 오드리 헵번은 지난 88년 유니세프의 친선대사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인도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오드리 헵번은 54년 브로드웨이 연극 ‘온다인’에서 함께 공연한 배우 멜 페러와 결혼했다 68년 이혼한뒤 이듬해에 이탈리아인 정신과의사인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 이후 다시 이혼해 독신으로 살아왔다.헵번은 이들 두명의 남편사이에서 각각 한명의 아들을 낳았다.


오드리 헵번은 지난 80년대 초반에는 배우출신 사업가인 네덜란드인 로버트 월더스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었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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