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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역사반추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 편집국
  • 등록 2021-01-21 22: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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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전 오늘 1월22일 타계한 박완서의 문학과 서사
  •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친숙하다.


소설가 박완서(80) 씨가 타계한지 오늘로 꼭 10년이다. 2011년 1월22일 오전 6시17분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한국전쟁을 겪고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불혹의 나이에 <나목>으로 <여성동아> 장편 소설 현상 공모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주요 작품으로는 <휘청거리는 오후>(1977년), <도시의 흉년>(1979년),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년), <아주 오래된 농담>(2000년) 등의 장편 소설과 그간의 단편 소설을 묶어 지난 2006년 펴낸 여섯 권의 단편 소설 전집과 소설집 <친절한 복희 씨>(2007년)가 있다.

 

고인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탄탄한 서사에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녹여내 가부장제, 중산층의 속물성 비판 등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노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서 한국에서 보기 드문 노년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또 작가 인생 전체를 거쳐서 대중적인 사랑도 독차지했다. 

 

고인은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도 지치지 않은 창작욕을 이렇게 표현했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 나의 새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 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 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폐증이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 주겠는가.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 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당신의 똬리를 틀었던 성북구 돈암동에서.......

벌써 10주기다. 박완서 작가가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된 것이다. 

세월이 쏜살 같음을 새삼 느낀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다작 작가기도 하거니와 영원한 현역 작가일 것 같은 그의 소설을 더 이상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박완서라는 이름은 친숙하고 정겹기까지 하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친숙하다. 그의 사후 그의 작품, 그에 관한 작품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세월이 쏜살 같다고 느꼈던 이면에는,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걸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그의 작품'과 '그에 관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 사정이 있다. 독자에게 그는 여전히 현역 작가이다.


소설가의 소설(글)은, 소설가의 사상을 대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말은 무엇을 대변할까? 아마도 소설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글)이 외부를 향한다면 말은 내부를 향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박완서 작가는 그동안 수많은 소설을 써왔다.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봐 왔다. 종종 그의 말을 들어왔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고 소설로 말을 대신해 왔다고 생각했다.


박완서의 대표작 나목

이제 떠나고 없는 그의 말이 듣고 싶던 찰나, 소설가 박완서의 대담집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문학동네)이 나왔다. 살아 생전 그는 어떤 말을 했을까. 그의 소설과 일맥상통할까. 아니면 소설에서와는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말과 그의 소설은 일맥상통한 면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1980년부터 2010년까지, 데뷔 10년부터 영면에 들기 바로 전 해까지의 생각 또한 일맥상통했다.

박완서 작가는 1970년 사십이라는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다고 한다. 지각생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늦게 데뷔했는데, 이후 왕성한 활동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확고한 작가적 위치를 굳히며 대표 작가로 주목 받았다.


그의 데뷔작 <나목>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늦은 나이에 그것도 주부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 문단에 상당한 충격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쪽이다.

 그가 사십에 데뷔하기 전까지 주부로서의 삶을 산 것이 다 문학수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체험과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상력만 과잉 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말이다.


박완서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6·25다. 특히 대부분의 6·25 관련 작품들이 남성들의 체험을 남성들의 시각으로 그리곤 했는데, 박완서는 여성들의 체험을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박완서는 남다른 그 경험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글로 씀으로써 기억해야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그는 하고 싶은 일, 글로 기억하는 일을 했고 그게 바로 6·25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그는 여성에 천착했다. 6·25와 여성, 일상 등 그가 천착한 키워드들을 들여다보면 별다를 게 없다. 솔직히 재미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의 글은 참으로 잘 읽히고 재밌다. 생각에 막힘이 없고 시원시원하게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 안을 제대로 집어내기 때문에 공감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박완서의 소설을 그리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다. 주요 작품들 몇 편만 접해봤을 뿐인데, 그건 아마도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들 때문일 것이다. 그가 너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다는 것, 대표적인 여류 작가로 여성에 천착한 소설을 썼다는 생각, 별 것 없는 일상을 잘 풀어내기만 했을 거라는 편견, 6·25에 너무 편중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등이다.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그것들이 크게 작용했다.


이 대담집은 그런 점들을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간에서 말하길, 이러 저러 하더라. 이에 그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결코 틀리지 않다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했고 이렇게 썼다'고 말한다. '이웃들의 삶 속에 존재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었고, <미망>에서 좋은 의미의 자본주의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참으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박완서를 다시 만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좋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를 기리는 것들이, 하지만 나에겐 다르게 다가왔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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