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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장영하의 삶의 궤적 / 그 시작과 끝의 경계사이
  • 편집국
  • 등록 2021-06-28 0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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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스토리, 단국대 법선제 박종숙여사가 들추어 낸 어제의 추억들

법무법인 디지털 대표변호사 장영하

사람이 욕망하는 일이 없었다면 노력이라는 걸 할까. 이 질문을 거꾸로 해볼 수도 있겠다. 

노력이 없었다면 하고 싶은 욕망을 쟁취 할 수 있었을까. 


변호사 장영하 인생의 역사는 그가 법관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입학한 단국대 법대와 함께 

서울 한남동 캠퍼스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이 무렵의 법대학생 장영하는 법학을 배우는 것과 함께 사랑과 지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혜안을 배웠다.   


누군가에 대한 배려와 포용이 진실이 될 때, 그 속에서 이는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바로 법학도 장영하가 기숙했던  단국대 법선제(法禪薺)의 박종숙여사다. 


장영하변호사가 지금도 그 당시의 감사함에 잊지를 못하고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필자는 이 부분을 장영하 변호사를 통해 회자시키는 것보다는, 박종숙여사 스스스로가  

단국대 법선제에서의 일상을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잡지 女苑(여원)에서 밝힌 술화를 옮겨 본다. 

우리는 당시 단국대 법선제에서의 장영하 학생이 정교함, 단백함, 배려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박종숙여사가 말한 구절을 인용하면, “1974년 4월5일, 죽어서도 잊지못할 그날, 

43세의 한창 나이에 나는, 법선제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40대의 청춘을 법선제에 묻어 버렸다. (중략) 법선제에서 맞는 첫날은 내 정신을 홀딱 뺏어갔다.뭐가 뭔지 토옹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코에서 당김이 나올 정도로 힘이 들었다.

잠을 자면서도 몸부림을 얼마나 심하게 쳤던지, 사방벽에 팔다리를 부딧혀서 아침이면 팔다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고달프고 힘에 부쳤다.

외동따달로 곱게 자라 일이라곤 모르던 내가 하루 아침에 8명이나 되는 대학생(단국대법대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제 정신이 없었다.

새벽 3시경이면 일어나 아침 밥을 짓고, 8개의 도시락을 싸고, 아침 상을 2군데씩 나눠 차리고 태산처럼 쌓여진 빨래 감이 떠억 버티고 섰고, 또 점심 준비를 하다보면 어느 새 저녁, 부랴부랴 시장을 다녀오고 저녁을 끝내면 밤 9시가 넘어서야 잠지리에 드는 생활이었다.”고 화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부분에서 단국대 법선제가 어떤 곳인지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법선제는 단국대학교 사법고시 준비생들이 공부하는데 적합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1년에 한 차례씩 엄격한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여 기숙시키는 곳인데 박종숙 여사는 이 법선제에서 1기 학생들만 빼고 모두 12기생까지 전부 자신의 손으로 밥을 지어먹이고, 옷을 빨아 입혔다.

이 때 박종숙여사는 사실 혹사라고 할 정도로 심한 육체적 고단함을 견디어야 했다.

 

이 무렵 단국대 법대학생 장영하는 박종숙여사의 그 고단한 육제적 지난함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매일같이 부식을 마련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조치로 냉장시스템을 마련했고, 태산처럼 쌓여진 빨래감이라고 진저릴 내던 일도 세탁기를 지원해 줌으로써 단촐하게 만들었다. 

당시 장영하 학생의 이같은 기발한 발상은 사실상 박종숙여사의 육체적 노동을 반으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여유로움까지 주었다. 동시에 당시 학생들도 편했고, 박종숙여사의 노고를 휠씬 가볍게 해 주었다

사실 이 때, 장영하변호사가 총무를 맡기 전의 학생들 평소 만족도가 70정도 였다면, 그가 총무를 맡고서 부터는 150% 만족도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학생 장영하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은 사랑과 배려, 그리고 일에 대한 효율성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생 장영하의 반듯한 마음과 결단성을 박종숙여사가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장영하 변호사는  법학도로서 고시공부를 할 때 뿐만 아니라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로 임용된 후 부임지에 가서도 계속된다.


이 같은 일화는 단국대 법선제 당시를 회상하는 박종숙의 발언에서 노정되고 있다. 

박종숙여사가 월간 여원을 통해 밝힌 내용을 더 들어보도록 하자.

박종숙여사가 술회하고 있는 시기는 장영하변호사가 부산지법 마산지원 판사로 재직 중일 때라는 것을 박종숙여사의 발언에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마산지원 판사로 있는 장영하 학생을 나는 평생토록 잊지 못한다. 영하 학생은 전국 어디엘 가 있더라도 내 생일이 되면 생일카드와 축전을 빠트린 적이 없었다.

특히 법선제에서 기숙하고 있을 때도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도록 친자식처럼 날 아껴 준 학생이었다.” 회고 했다.


 장영하 변호사보다 단국대 법선제 박종숙 아주머니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과 한 때의 감정에 깊이 박힌 기억들이다. 

장영하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행복은 가장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라든지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식의 말을 많이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 분투하는 장영하변호사에겐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판사임용은 서울대법대 출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기존의 고착적 입장을 깨트려, 사법계의 큰 주목을 받으며 하나를 습득하면 열 개의 지혜를 짜내는 천재라고 평가받은 변호사 장영하의 궁극적 목적 지향은 지금도 줄달음 치고 있다. 


장영하 변호사는 성찰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장영하변호사는 “사람은 관심의 크기나 깊이에 따라서 삶은 사뭇 달라진다.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발전의 첫 출발지는 관심이다. 호기심도 상상도 모두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는 과학이나 예술로 발현된다. 모든 위대함은 바로 작은 관심에서 비롯된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주어진 일만 하는 피동적인 삶을 사는 죽은 사람과 같다. 동물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모든 시작이 그렇듯이, 모든 출발이 그렇듯이, 관심을 무엇에 두느냐, 그리고 이것에 얼마나 열중하느냐에 따라 관심은 전혀 다른 결과로 발전하고 변모하게 된다.”고 토로하면서, 자신이 왜 성남시장에 집착하는지를 내비췄다. 


우리는 나이 스믈에 법학도 장영하 학생이, 법선제에서 일하는 한 아줌마의 고단함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헤아림에서 깊은 인간미도 발현해 냈다.


계속......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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