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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즘에 유혹되는 마성(魔性)의 톱 싱어 조관우
  • 편집국
  • 등록 2021-07-26 07: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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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지금 ‘조관우’인가
  • 격정적인 마성의 삶과 예술… 이유 있는 시련....


사람들은 그의 노래 결말에  “완전한 전율”이라고 했고, 음악평론가들도 “옥빛 목소리를 가진 보배”라고 묘사한 세기의 현존하는 최고의 싱어'She's the best living singer.‘조관우가 

스테이지 컴백을 목마르게 고대하고 있다. 


“카스트라토 {변성기 이후 음역이 내려가는 것을 막고 여성의 음역을 내기 위해 거세한 가수를 말한다. 여성의 소프라노의 음을 낼 수 있다. 최후의 카스트라토는 20세기 초반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최후의 카스트라토는 알레산드로 모레스키(Alessandro Moreschi, 1858∼1922)이다.}적  팬덤의 시초인 조관우는 예술적인 역량뿐 아니라 파란만장한 인생으로 인한 신비감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팬덤 현상이 반복되는 것 같은 현실에 있다. 


당대 다른 가수들이 강한 바이브레션의 목소리로 창가의 아름다움을 주로 표현했다면, 

조관우는 극적인 목소리로 인간의 본성과 구원을 드라마틱하게 호소한 아티스트다. 


이 글의 작자는 무대에서 그를 보았다. 타고난 재능과 패러독스한  미성,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삶이 된 노래. 그는 무대의 강자이면서 사랑의 약자였다. 실패한 결혼, 실패한 사랑에서 그는 얼마나 연약한 인간이었던가. 

영원처럼 길었을 시간 후에 돌아온 인간적 고행이 계속되지만,  끝내 그를 구원한 것은 연인도, 가족도 아닌 무대였다. 무대 위의 조관우는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였고 그 완벽은 감춰진 눈물로 세공된 것이었다. 불이 켜지고 노래가 시작되면 그는 겨울 들판에 우뚝 선 인고의 기둥이었다. 도저(到底)하고 고독한.


이 글들이 싱어 조관우의 신비와 매력을 온전히 다 전해준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일단을 매우 새로운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조관우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언어로 털어놓는 것이 매력이다. 

우연히 조관우와 마주친 필자는 운명처럼 그의 삶을 발견했다. 


싱어 조관우를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의 화려했던 생활에 주목할 수도 있다. 그는 누구와도 다른 목소리와 기교로 당대 최고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제 안에는 두 사람이 있다. 가수로 살고 싶지만 내 개인의 인생에 잦아든 애환같은 것도 견디어 내야 한다. 때문에 이  둘을 최대한 같이 지키려고 한다.” 조관우의 말이다. 

필자는 다시 물은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나?”에 대한 답변에서  

“둘이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관우는 이미 싱어로 살아왔으니까. 

내 노래와 내 일 모두에는 항상 내 인생도 담겨 있다.  모든 일에 진심으로 임한다. 그래서 누군가 내 노래와 노랫 말에 정말 귀를 기울인다면 인간 조광호와 가수 조관우 모두를 만날 수 있을 있다” 라는 언칭이 귓전을 아프게 했다. 


1994년 1집 앨범 'My First Story' 를 발표하여 데뷔했지만, 사실 조관우의 실제 데뷔앨범은 1994년이 아닌 1992년으로 봐야 한다. 

자신의 본명으로 낸 '조광호' 라는 앨범이 실제 그의 첫 앨범이 '이제는 너를' 이라는 곡이 그 당시 출품되었기 때문이다.  조관우는 94년 SBS 쇼탤런트 출신인 부인 장복신씨와 결혼했고,  같은 해 조관우가 첫 음반 을 내며 톱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 절의 시기인 95년에 첫 아들 휘, 99년에 둘째 현을 낳았다.  수 여개의 음반을 내는 동안 조관우는 아내 장복심에 대해 ‘나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음악적 선생’이라 칭할 정도로 그의 음악인생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노래 실력에서도 남편에 전혀 뒤지지 않아 조관우의 모든 음반에 코러스로 참여했고, 콘서트 무대에 올라 함께 올라 듀엣 곡을 부르기도 했다


특시 얼굴 없는 가수로 컨셉을 잡고 활동한 한국 가요계의 기원이다. 때문에 음악 방송이나 콘서트는 활발하게 했지만, 유흥업소 출연을 하지 않고,  MR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관우만의 자존같은 것이 이미 그의 DNA 속에 잉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판소리의 대가인 조통달이 그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치 않을 것이지만,  희대의 명창  박초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명창이다)이 그의 이모 할머니였다는 것엔 오늘날의 조관우 이면에 거역할 수 없는 핏줄의 내력 영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영향은 조관우에게 판소리, 창 그리고 가야금에 재주를 보여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가야금을 전공하게 만들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 음악을 접해 왔으며 국악을 그만둔 이후 완전히 미국 디스코/펑크 밴드들의 음악에 빠지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비 지스와 같은 가성 창법을 이용하는 록밴드[6]나 Earth, Wind & Fire 등 가성을 사용하는 흑인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여기에 감명받은 조관우는 자신만의 가성 창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은 이후 조관우의 특징이 된다.


참고로 조관우의 전성기 가성이 6옥타브, 7옥타브라는 음역에 도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를 대표하는 곡인 '늪'이나 '꽃밭에서' 등을 들어봐도 '늪'은 4옥타브까지 올라가고, 8집 imprssion의 수록곡 '그랬죠'가 4옥타브 도♯이라고 한다. 그의 가성이 여자조차 누르는 음역대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가성이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 대중음악평론가들에게 조관우가 호평을 받은 것은 단순히 가성으로 노래해서가 아니라 가성을 아름답게 내고 유지할 수 있으며 진성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카운터 테너와는 또 다른 특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자신만의 창법으로 50이 넘은 나이까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가성으로는 세계 제일로 평가받는 머라이어 캐리마저 나이를 먹으면서 목이 상당히 손상된 것에 비해서 독학으로 정석적인 카운터 테너가 아닌 팔세토 창법을 개발해서 그 성대를 유지한다는 것만 봐도 조관우가 그냥 날로 먹는 가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황 나훈아가 한국의 국민 음악인이라면 조관우는 세계인의 음악에 한국의 장조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찰랑거리는 리듬을 깔고 지적이면서도 달콤하고 감미로운 멜로디와 하모니를 얹어내곤 한다 

<이제는 너를>을 타이틀로 한 첫 솔로앨범을 1992년에 발표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한 댄스음악이 본격적으로 주류음악으로 들어오던 시절이라 성인가요에 가까웠던 조관우의 음악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994년 전설의 명곡 <늪>이 힛트 되면서, 톱싱어 반열에 올랐다. 



<늪>은 조관우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곡이다. <늪>이 이처럼 대중들에게 슬픈 발라드로 각인 될 수 있었던 데는 조관우의 노래 실력 덕분이었다. 조관우는 <늪>에서 진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가성으로만 노래를 부르는데 단순히 가성으로 높은 음을 찍고 오는 것이 아니라 높은 음을 오래 유지하는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 이때 조관우는 제대로 된 방송출연 한 번 하지 않고도 타이틀곡 <늪>에 이어 후속곡 <다시 대게로 돌아와>까지 히트시켰다. <다시 내게로 돌아와> 역시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슬픈 발라드지만 <늪>처럼 지나치게 우울한 노래는 아니었다.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밝은(?) <다시 내게로 돌아와>를 더 선호하곤 했다. 그렇게 1집으로 대박을 친 조관우는 1995년 겨울 뜬금없이 리메이크앨범을 발표해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다수의 리메이크 명곡들이 들어 있는 조관우 2집은 2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조관우의 트레이드 마크인 가성 대신 진성으로 노래 대부분을 부른 조관우는 특유의 감미로우면서도 쓸쓸한 목소리로 원곡과는 다른 매력을 전달했는데 그게 바로 <님은 먼곳에>였고,  2008년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면서 배우 수애가 또 한 번 리메이크했다.


하지만 이 앨범에 <님은 먼 곳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리메이크곡은 따로 있었다. 바로 1982년에 발표된 정훈희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꽃밭에서>였다. 

당시 조관우 노래를 통해 <꽃밭에서>를 알게 된 젊은 세대들과 정훈희의 원곡에 익숙한 부모님 세대들은 조관우의 노래를 통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조관우의 <꽃밭에서>는 리메이크의 최고 순기능인 '세대연결'을 제대로 시켜준 노래가 됐다.

이 앨범에서는 공일오비가 리메이크했던 <슬픈 인연>의 조관우 버전도 들을 수 있다. 공일오비가 기타선율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느낌으로 편곡했다면 조관우는 진성과 가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기교를 최대한 살려 <슬픈 인연>의 슬픔을 극대화했다. 리메이크가 아닌 오리지널 신곡이 두 곡 들어 있는데 두 곡 모두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늪>을 만든 하광훈이 작사·작곡한 <겨울이야기>는 공교롭게도 DJ DOC의 동명곡과 비슷한 시기에 나오면서 본의 아니게 맞대결을 펼쳤다. 당시 표면적인 인기로는 <가요톱텐> 3주 연속 1위를 차지한 DJ DOC의 <겨울이야기>가 앞섰지만 조관우의 <겨울이야기> 역시 발라드를 좋아하는 대중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았다.



또 하나의 신곡 <모래성>은 조관우가 특별한 기교 없이 담백하게 부른 정통 발라드 곡이다. 특히 "괜찮아요 나도 예전엔 누구의 마음 아프게 한 적 많았죠 이해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게 그 때의 대가인가 봐요"라며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조관우의 감성적인 보컬이 돋보였다. 조관우 2집은 20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현재까지도 단일 리메이크 앨범 최다 판매량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조관우는 더욱이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연기자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JTBC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와 KBS 시트콤 <닥치고 패밀리>, 영화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 <그것만이 내 세상>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필모그라피를 쌓았다. 조관우의 연기력은 차치하더라도 90년대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서태지와 아이들 이상의 '신비주의'를 지켜온 조관우의 시트콤 출연은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50대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멋진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는 조관우는 '한국의 파리넬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가수다.


불멸의 매혹적 가수인 것은 분명하지만,훌륭한 연주자가 아니었음에도, 격렬한 모습으로  

연주하는 조관우의 이미지는 그만의 장르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인 데뷔 앨범의 커버를 장식하는, 늪은 한 시대에 이 격정적인 음악을 대표하는 강렬한 이미지가 됐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조관우가 더없이 매력적인 목소리와 타고난 가창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높은 소프라노의 영역에 자리한 그의 맑고 고조한 음색은 기름지고 풍성한 색채로 특징된다. 지극히 부드러운 속삭임을 비롯한 고음부의 다양한 표현력과 격한 샤우트와 팔세토에 이르는 고음부의 탁월함은 그의 노래에 불멸의 생명력을 부여한 더없이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음악은 한 시대의 버디 홀리(Buddy Holly)를 비롯해 비틀스와 밥 딜런(Bob Dylan), 엘튼 존(Elton John), 퀸(Queen), 클래시(Clash),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등 수많은 천재 음악가들을 생각게 한다.  


그가 남긴 숱한 영혼의 음악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이름 조관우가 그 매혹적인 목소리가 ‘위대한 전설’일 수 있는 이유다.


조대형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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