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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그 비운의 잔혹사를 마감하다
  • 편집국
  • 등록 2022-05-11 05:57:27
  • 수정 2022-05-11 06: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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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위에 군림하는 '구중궁궐'의 상징이 국민의 시청 대상으로 둔갑

한국법제발전연구소이사장. K-대사모(대한민국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총재 석종현


'푸른기와 집'을 뜻하는 청와대(靑瓦臺)가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다. 윤석열 대통령이 70년의 청와대 역사를 단절하는 새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직후 대통령집무실 용산시대를 공식 개장했다. 지난 70년 권력의 심장으로 군림하던 청와대가  5월10일 시민들에게 전격 개방됐다. 

'구중궁궐'로 상징되는 청와대의 터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소지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인데, 경복국의 뒷편으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총독관사가 들어섰던 자리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이 건물을 '경무대'로 이름을 바꾸며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했다. 사실상 청와대의 시작인 셈이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을 거치며 윤보선 전 대통령은 경무대를 지금의 청와대(靑瓦臺 푸른기와집)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들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집무를 봤다. 이들 가운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를 이전하려고 도모했다. 

권부의 심장이었던 만큼 현대사의 굴곡기 마다 청와대는 그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21 사태'와 '10·26 사태' 였다. '1·21 사태'는 1968년 김신조 등 북한무장간첩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위해 침투한 사건으로, 당시 무장간첩들이 북한산을 넘어 청와대 뒷산으로 침투했다. '10·26 사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서거한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1979년 10월 벌어진 이 사건의 장소가 다름아닌 청와대 안의 궁정동 안가였다. 청와대의 면적은 미국 백악관에 비해 3배이상 넓다. 1992년 노태우대통령 당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때, 청와대를 보며 "백악관과 맞바꾸자"는 농담을 건넨 일화는 유명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고 동기이기도 한 승효상 건축가는 5년전 CBS와 인터뷰에서 청와대를 '봉건왕조시대의 짝퉁 건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청와대는 원래 이 장소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의 왕조의 정통성을 폄하하기 위해서 경복궁 뒤에 총독 관저를 지을 터를 거기에 마련했기에 그 자체부터 불순하다. 그 이후 지금의 모습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지어졌는데 전형적인 봉건왕조 건축의 짝퉁 같은 모습이다. 콘크리트로 목조 흉내를 내서 지었으니 영락없는 짝퉁이다"라고 했다. 그는 청와대 내부공간에 대해 "내부 공간은 더 참혹하다. 내부가 지나치게 광활하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신체에 맞는 알맞은 크기가 있다. 굉장히 큰 공간에 들어가면 스스로 위축된다. 그게 한두 번 들어가면 괜찮지만 평생을, 몇 년을 지속적인 일상을 보낸다면 그 공간의 위용에 자기 스스로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행동이나 그것에 따라 성격도, 사고도 바뀐다”고 했다. 그는 “우리 대통령의 집무실, 회의실은 천장이 어마어마하게 높고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봉건왕조의 허위의식을 빌려서 만든 게 청와대라서 거기에 거주하게 된 사람은 결국 그런 식의 허위적 위세를 갖고, 청와대 사신 분들의 말로가 행복한 분을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실제 청와대 내부를 들어가 본 정치인들은 "문을 열고 대통령 집무실까지 이동하는 거리가 예상보다 길다. 집무실까지 이동하는 사이에 대통령께 쓴소리를 할 마음조차 주눅이 들 정도라고 한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청와대는 시민과 격리되어 있고, 국민위에 군림하는 '구중궁궐'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윤 대통령 당선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을 남겼다. 궁궐같은 공간에서 왕같은 대접을 받다보면, 마음이 바뀌어 대통령으로서의 초심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식 직후, 지난 70년 영욕을 함께한 청와대의 역사를 끊어내며 '국민과 소통하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이 굵게 그어졌다. 

사실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우리 대통령 역사는 참으로 비참하다. 이른바 청와대 잔혹사(殘酷史)다. 초대 이승만은 1960년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발발, 쫓겨나 망명지에서 숨졌다. 다음 윤보선은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공산주의적 인민혁명을 시도한다고 날조(捏造)해 관련자들을 처벌한 사건] 배후 지원 혐의로 실형을 받았다. 그 뒤를 이은 박정희는 더욱 비참했다. 술자리서 고향 후배이자 군 동기생에게 총 맞아 숨졌다. 어떨 결에 대통령이 된 최규하는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밀려났다. 탱크와 무력을 앞세워 정권을 포획한 전두환과 그의 육사 친구이자 쿠데타 세력인 노태우는 부정축재와 쿠데타 혐의로 교도소를 다녀왔다. 그다음 김영삼과 그 뒤를 이은 김대중은 용케도 옥체를 보존했지만 아들이 감옥소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다음 노무현은 가족의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다음 이명박은 아직 건재하다. 하지만 국군 사이버사령부·국가정보원 정치개입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그의 턱밑까지 치달아 잔혹사에서 벗어날지 의문이다. 우리 최초 여성 대통령이었던 박근혜는 국정농단(壟斷)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명예롭게 퇴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백의종군한 전직 대통령을 찾아볼 수 없다.

 

네미 성소의 사제와 우리 대통령이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지배의 위치를 획득한 점과 비운(悲運)에 처한 점이 닮았다. 다른 점은 '네미 성소의 사제는 규칙에 따라 현직에서 살해당하는 반면, 우리 대통령은 지배 권력을 잃은 뒤 자업자득이던 보복성이던 후임 정권에 의해 파멸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비운을 피하지 못했는가? 지배의 향유, 권력욕(權力慾)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권력은 '타인 또는 조직단위의 행태를 좌우할 수 있는. 즉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다. 그래서 권력은 정치의 본질이다. 네미 성소의 사제는 왕을 겸한다.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대통령도 국가운영의 전권(全權)을 갖는다. 모두 무한대의 권력 행사에 대한 욕구로 충만하다. 바로 월권(越權)이고 권력남용(濫用)이다. 이처럼 권력은 애초부터 비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권력자 대부분은 이 비운의 씨앗을 죽이지 못하고 부지불식 자라게 한다.

 

기원전 그리스 테베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대혼란을 불러온 살인범,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를 잡아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살인범을 잡는 과정에서 그 살인범이 바로 자신임을 알았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백성과의 약속을 지켰다. 자신이 자신을 처벌했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를 떼어 자신의 눈알을 파내 철저하게 파멸했다. 눈을 찌른 이유는 하늘과 백성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자의 비운은 멈출 줄 모르는 권력욕 때문에 빚어진 필연임이 분명하다. 청와대 잔혹사에서 벗어나려면 권력에 목숨을 거는 이른바 '네미 성소의 살해 관습'을 깨야한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철저하게 책임지는 용기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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