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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 전 오늘, 이승에서의 작별을 고한 가수 차중락을 애도하며
  • 편집국
  • 등록 2022-11-10 10:40:34
  • 수정 2022-11-10 10: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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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로큰롤(Rock 'N' Roll)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62년에 발표했던 번안곡이지만, 감성적인 정취를 곁들인 차중락의 청아한 바이브레션이 있었기에 더욱 울림…

 [조대형대기자] 

 

그대는 가고 쓸쓸한 거리

낙엽은 지고 황혼이 지는데

아~사모치는 아~그리움에

아득한 비의 추억을

못잊어서 나홀로 운다

 

그대는 떠나 세월은 흐르고

강물도 흘러 슬픔을 씻는데

아~흩어지는 아~그 목소리

아득한 메아리가

그리워서 나홀로 운다

 

1960년대 중반의 격동기에 매혹의 가수로 활동한 차중락의 노래로 기억되는, 아니 필자가 가장 선호하여 열창하기도 한 ‘그대는 가고’의 노랫말이다. 약관의 나이에 요절한 차중락의 절절한 노래와 허스키한 목소리는 인간이 지닌 운명과 숙명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차중락의 대표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로큰롤(Rock 'N' Roll)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62년에 발표했던 'Anything That's Part of You'와 이의 번안곡이지만, 감성적인 정취를 곁들인 차중락의 청아한 바이브레션이 있었기에 더욱 울림이 컸다.

 

물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원곡내용과 조금 다른 의미가 있는 노래다. 한 연인과 헤어진 뒤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사랑했던 추억들을 찾아 헤매는 한 남자의 애절한 사연이 담겼다. 차중락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만해도 무명가수였다. 우리나라 최초 보컬밴드라 할 수 있는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가요계엔 1963년 데뷔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폴 앵카의 모창으로 미8군 무대 등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에 얽힌 일화가 있다. 차중락은 이 노래를 취입하기 전 수년간 사귀던 이화여대생과 헤어지면서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곡을 번안한 신세기레코드 사장 아들 강찬호도 사정이 비슷했다. 강씨는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번안가사)에 ‘Anything That's Part of You’을 편곡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처음엔 독집음반을 준비하던 가수 쟈니리에게 주려했다. 하지만 실연을 당한 자신처럼 차중락도 여대생 집에서 결혼을 반대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다는 걸 알고 그에게 곡을 줬다. 그렇게 해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1966년 11월 신세기레코드를 통해 발표돼 처음엔 부산서 돌풍을 일으킨 뒤 전국을 흔들었다.

 

미국서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Anything that's part of you’가 우리나라에서 사랑을 받은 데엔 이유가 있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콧소리와 떨림이 섞인 차중락의 애잔한 목소리, 영문노랫말과 다른 느낌의 번안가사, 곡 발표시기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가요계 분석이다. 차중락의 요절과 슬픈 사연도 인기에 한몫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계절이 가사 속의 낙엽 지는 가을이어서 팬들이 음반을 더 많이 찾고 불렀다. 노래제목처럼 차중락 본인을 암시하는 듯한 곡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차중락의 인기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어졌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차중락의 무덤가에서 밤샘을 하는 소녀들이 있을 정도였다. 무덤 옆 돌로 만든 성(城)엔 아가씨들 편지가 쌓였다. 우체통역할을 한 성 안엔 고인에게 바치는 연서(戀書)들이 수북했다. 

 

1969년 2월 11일 세워진 최중락의 추도비엔 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시가 새겨져 있다. 제목은 ‘낙엽의 뜻’. 조병화 시인이 짓고 그의 맏형 차중경이 세웠다. 내용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노랫말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차중락은 1942년 서울 신당동에서 8남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차준달)은 큰 인쇄소를 해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부친은 보성전문 마라톤선수, 모친(안소순)은 경기여고 단거리선수였다. 시인 김수영은 큰이모의 아들로 이종사촌간이다. 

 

차중락은 장충초등학교, 경복중, 경복고를 다니며 육상선수로 뛰었다. 대학(한양대 연극영화과 중퇴)에선 보디빌딩을 해 1학년 때인 1961년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잘 생긴 얼굴, 건장한 몸매,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 박은 목소리로 19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 ‘코리언 엘비스’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정서를 접목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가 음악에 관심을 가진 건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4층 음악감상실에서 접하게 된 팝과 재즈에 빠져들면서부터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서 노래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감독공부를 하겠다는 꿈을 갖고 1963년 학교를 중퇴, 밀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까지 겹쳐 방황했다. 

 

그는 키보이스 맴버인 사촌형(차도균) 권유로 1963년 키보이스 리드보컬에 합류, 새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 모창을 멋들어지게 하며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인 시민회관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에겐 솔로가수로의 유혹이 거셌다. 1967년 솔로독립 후 아침에 눈을 뜨면 찬 콜라를 2병이나 마셔야 정신을 차릴 만큼 피로가 쌓이고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의 라이벌은 드럼연주자출신의 인기가수 배호였다. 친구였던 둘은 가요황금기의 쌍두마차로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여성,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 사랑을 받았다. 

 

솔로가수가 된 차중락의 최대히트곡은 TBC 라디오드라마주제가 ‘사랑의 종말’(1967년).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 신인가수상을 받은 명곡이다. 그러나 그가 좋아했던 곡은 ‘마음은 울면서’와 ‘철없는 아내’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의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 접근이 스캔들로 비춰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 부담이 됐다. 건장했던 그도 인기란 족쇄엔 무기력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가수생활과 스캔들에 시달리던 그는 서울 동일극장 무대에서 고열로 쓰러져 1968년 11월 10일 27세 나이에 뇌막염으로 숨을 거뒀다. 그가 생전에 남긴 노래는 20여곡이다.

 

 흔히들 한국판 엘비스플레슬리는 남진이다. 또 영화배우겸 가수출신 목사 남석훈씨를 지목하는데 자세히 노래를 들어보면 아니다. 

 

남진은 낫킹콜이란 미국가수의 창법이지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구사하는 엘비스플레슬리로 볼 수가 없다. 복장만 엘비스 흉내를 냈다고 엘비스가 아니며 남진이 수학한 학교 경복중,고등학교 선배이자 동시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선배인 차중락이 진찌로 오빠부대의 원조였던 것이다. 車重樂이 잠든 망우리공원 묘지엔 死後 54년이 지나도록 이름 모를 팬이 눈물로 씌어진 팬레터와 정기적 행사처럼 갖다 바친 꽂바구니는 지금도 지속되었고 극성스런 팬들의 절절한 성원은 시대적 애잔한 슬픔을 전래해주는 전설의 가수로 남아 있다.

오늘 2022년 11월 10일이 그의 죽음 54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설이나 신화 속으로 사라져가는 불멸의 연예인들이 있다. 차중락---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차중락 그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손님>인 것이다.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항시 떠날 준비를 해왔다. 저 세상으로 말이다. 어둠은 경이(驚異)로 열리고 그의 목소리는 당신의 가슴 속에서 아늑하게 울리며 긴 여운을 남긴다.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나직하게, 그러나 그 속에는 걸잡을 수 없는 분류를 담고 있다.

그의 내부에서 끈덕진 열을 뿜으며, 모든 습관의 예복과 미지근한 생의 소도구들을 불태워버리는 그 광기로써 그는 당신을,아니 자기자신을 보석과 같은 순간의 빛 속으로 해방한다.

그의 의식이, 그의 언어가 집요하게 떠밀고 가는 순간의 지속-그것이 바로 그녀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귀한 선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동요하며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보도 위에서 먼 곳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남몰래 훔쳐 보았다. 그의 눈은 쉬지 않고 인식을 향하여 손짓을 하고 있었다.

차중락은 짧은 생애를 가득한 긴장 속에서 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그는 누구보다도 가난했다.그는 하나의 활화산이었다. 이 토지에 살고간 스물 여덟해, 자기의 생을 완전하게 산 가수였다. 그는 오늘의 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언제나 말을 했고 언제나 노상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노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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